책이 도착했다.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을 때는 한달정도 걸려야 배달이 된다고 하였는데 생각 외로 일주일 만에 도착한 책이다.
한국 최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작가의 최신작이라는 띠지가 붙어있다. 노벨문학상을 탄 작품을 번역이 아닌 오리지널 문장으로 읽을 수 있게 되다니... 설레다 못해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난 영국 여행 중에 그곳의 광활한 자연을 마주하고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였다. 어린 시절 동네 이발소에 걸려있는 액자에서 '초원의 빛'이라는 시를 처음 읽었다. 그 후 윌리엄 워즈워드는 영국의 유명한 작가이고 이 시 또한 명시라는 걸 고등학교에 와서야 알았다.
아무리 번역을 완벽하게 했다 하여도 원작의 감성을 오롯이 전하지는 못한다. 그랬는데 단 며칠 동안이었지만 자연을 즐기며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 스며들었던가 보다. 넓은 풀밭에 무리 지어 피어있는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본 순간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라는 시구가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마치 어느 봄날 섬진강변에서 먼 산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라는 노래가 자꾸만 맴돌았던 그런 느낌과 유사하였다.
'작별하지 않는다'(We Do Not Part)를 주문하고 나서는 어디서고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았다. 혹시라도 이야기의 내용을 미리 알게 된다면 식은 밥을 먹었을 때처럼 글이 맛이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표지를 본다. 작가의 이름과 책의 제목, 출판사의 이름이 통나무를 세우듯 세로줄로 쓰여 있다 (아흔아홉 개의 통나무 중 한 개의 나무처럼.)
'작별'과 '이별'은 둘 다 '헤어진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나 어감은 다르다. 이별이란 단어는 슬픔이 존재하지만 작별은 왠지 다정함이 느껴진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다 안다. 우리의 언어는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누구나 아는 그 무엇의 감성이 있다는 것을... 노벨문학상을 탄 작품을 '우리들만의 그 무엇'의 감성을 가지고 읽는다는 것부터 릴레이의 선두에 서서 달리는 기분이다.
실은 요즘 나는 허리가 불편하다는 핑계로 심하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넷플릭스의 죽순이가 되어 흑백요리사를 정주행 하였고 그들의 드라마 같은 경연이 끝나자 여기저기 유튜브를 뒤지며 하릴없이 시간을 축내고 있던 참이었다. 장편소설을 읽기에 참 좋은 상태라는 뜻이다.
책장을 넘긴다.
주인공의 절친인 인선이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다. 목공일을 하던 그가 나무를 자르다가 그만
손가락 두 개를 날렸다. 당연히 아프겠지... 하지만 작가는 그 아픔을 조곤조곤 야릇하게 전해 주었다. 그 부분을 읽는 동안에는 내 집게손가락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집게손가락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에 이르렀고 더 다행인 것은 인선이처럼 손가락이 부러지지 않고 허리가 아픈 지금의 상황이 백 배 천 배 낫다고 여긴 것이다.
노벨상이 그 이름만큼 위상이 높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상은 작가에게는 명예와 영광을, 독자에게는 품위를 가져다준다.
오늘아침 감기기운이 있어서 병원에 갔다. 집과 가까운 곳에 있는 동네의원이지만 토요일은 오전 진료만 있기 때문에 진료신청을 하고도 한참을 기다려야만 했다. 모두들 마스크를 쓴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거나 멀뚱하게 앉아서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는 대기실 한 편에서 한 사람이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핸드폰이 세상을 점령하기 전 사람들은 어디서나 책을 읽었다. 공원이나 전철 안, 커피숖. 심지어 음악감상실 안에서도 책을 읽었다. 옆구리에 책을 끼고 걷는 게 멋스럽다고 느꼈으며 책을 들고 찍은 스냅사진은 모두 한 장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책은 우리의 벗이었다.
밖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본 것은 무척 오랜만이다. 더구나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바라보며 작가라는 이름으로 살면서 읽을거리를 세상에 내어놓는 일이 참 의미있는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곁에서 언뜻 보니 책 옆면에 도서관의 직인이 찍혀 있는 한강 작가의 작품이었다. 노벨상이 우리에게 주는 의의 중에는 책과 가까워지는 독자들을 어디서나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읽다만 책의 접힌 부분을 펼쳤다.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겐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헌디 너가 그 날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허영하게 묻엉으네..."
제주방언을 오롯이 이해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인선이 어머니의 투박한 제주 사투리가 마음을 울린다 정겹고 슬프고 시리다. 뭘까...
이 책을 읽는 전 세계 독자들은 인선이 엄마의 아픈 언어를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우리만 알 수 있는 한과 설움을, 더구나 세련된 표준어가 아닌 제주 방언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된 책은 독자에게 얼마 큼이나 전해졌을까.
그동안 노벨 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꽤 읽었다. 그중에는 몹시 감동을 받은 소설도 있다. 하지만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는 소련의 정서를 아는 독자들이, '설국'은 일본인이, '대지'는 영어권 독자들이 나보다도 더 깊이 있게 글을 이해하고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맙습니다."
누군가가 쓴 책을 읽으면서 작가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