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적이 언제였나요? 가끔 누군가 화두를 던질 때마다 적당한 답을 찾지 못하고 우물거렸다. 행복한 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행복의 잣대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망설였고 그중에서도 '가장'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행복의 순간을 찾으려고 하면 마음속 여기저기에서 자질구레한 행복들이 서로 튀어나오려고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눈물이 날 만큼'으로 행복의 척도를 정의해 버렸다. 우리 몸이 표출하는 감정의 표현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눈물은 가장 진솔하고 벅찬 마음의 신호다. 행복의 비중을 재는데 눈물을 대입해 보니 그동안 내가 행복이라 여겼던 일들이 어느 정도 추슬러졌다.
내가 지금껏 느꼈던 행복은 대부분 두 아이들을 통해서 얻은 것들이다. 이 순간들은 아련하고도 소중한 행복이었다. 어버이날에 비뚤비뚤한 글씨로 쓴 손 편지를 받았을 때,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을 하고 취직을 했을 때는 기쁨 뒤에 오는 뿌듯한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이 부시도록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딸아이를 바라보던 날은 감개가 무량하다 해야 할지... 눈물과 미소가 함께 어우러진 행복을 만끽했다.
처음 내 집을 장만했을 때의 행복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들이 뛰지 않게 조심해 달라는 아래층 노부부의 엄한 부탁에 늘 조심스러웠지만 그보다는 내 집이 생겼다는 기쁨과 행복감이 뭐든 감수하게 만들었다.
은퇴 후 남편과 꽤 긴 여행을 떠났을 때는 매일매일이 행복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어떤 낯섦과 만날까, 새로움을 접하는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 찬 날들이었다.
첫 출간한 수필집을 가슴에 안았을 때 가슴 벅찬 행복을 느꼈다.
손녀가 태어났을 때는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손녀의 재롱은 내 아이들을 기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의 행복을 주었다. 뒤돌아 보니 행복의 기억들은 삶에서 진통제가 되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상처를 덧나지 않게도 해 주었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들어 남편을 간병하면서 더 이상 행복이란 단어가 나와는 연이 닿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오늘 내 인생에서 가장 눈물겹고 값진 행복을 선물 받았다
오후 무렵 병원에 있는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직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 만큼 팔의 근육이 회복되지 않았기에 간병인을 통해서
걸려온 전화였다.
"여보 나 오늘 목관 뗐어"
전보다 조금 더 또렷했지만 이미 물기에 젖어 촉촉한 남편의 목소리가 전해졌다. 목관을 제거했다는 건 목의 근육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스스로 삼키고 말을 할 수 있고 숨도 쉴 수 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다. 남편도 나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동안 남편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보조기들이 하나 둘 제거되고 오늘 마지막으로 목관이 제거되면서 이제 남편은 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자립할 수가 있게 되었다.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쁜 소식을 나 혼자 간직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가족과 친지들에게 알렸다. 남편의 친구들에게도 알렸다. 행복이 배가 되어 돌아왔다.
봄비가 온다. 그동안 굳게 닫아 둔 거실 문을 열고 처음으로 뜰로 나갔다. 지난가을 떨어진 낙엽 사이로 연둣빛 싹이 움트고 있다. 새싹들은 이 비를 맞고 더욱 힘차게 자랄 것이다. 남편의 목에 새살도
곧 차오르게 될 것이다. 입원한 지 5개월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