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만의 속도

by 연희동 김작가

참 이상도 하지 요즘 뭔가를 깜박 잊어버릴 때가 쟈주 있다. 집안에서 어떤 물건을 가지러 그것이 있는 장소까지는 가지만 그곳까지 가는 동안에 내가 필요한 물건의 존재를 잊고 멍하니 서 있고는 한다.

냉장고 문을 열고 뭘 꺼내려고 했는지 한참을 생각하는가 하면 베란다에 나가서 이곳을 내가 왜 왔는지 이전의 상황을 거슬러 떠올리기도 한다. 매일 복용하는 혈압약과 영양제를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기억이 애매할 때도 있다. 글을 쓰다가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건 한참 되었다.


최근 들어 심해진 이런 현상이 혹시 치매의 초기단계 증상이 아닌가 하여 주변 지인들에게 하소연이라도 하면 그들은 한술 더 떠서 자신들의 건망증 활약상을 신명 나게 떠들어댄다.

결국 ' 우리 나이가 되면 누구나 다 그래'라는 합리적인 나이 탓 증후군으로 결론을 내버리곤 한다.


하지만 요즘 나의 건망증은 나이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급격한 변화이기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오늘만 해도 오래전에 화분에 심어놓은 화초의 이름이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한참을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네이버 신세를 졌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말과 다르게 엉뚱한 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입과 머리와 가슴이 서로 조율이 맞지 않는 것 같다.


건망증과 치매의 차이점. 건망증은 자신이 무언가를 자주 잊는다고 걱정을 한다. 치매는 자신이 잊고 있는 것조차 모른다.


네이버 선생이 알려준 명료한 답이다. 그렇다면 요즘 잦은 기억상실로 걱정이 많은 나는 건망증이 맞다. 그런데 왜 갑자기 건망증이 심해졌을까? 그에 대한 해답은 나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환경의 변화와 스트레스, 이 두 가지가 나를 멍청이로 만든 것 같다.


하룻밤 사이에 중증 환자가 되어버린 남편, 비어있는 남편의 자리, 어제와는 너무나 다른 환경의 차이에 나는 적응하지 못하고 쩔쩔맸다. 더구나 환자의 보호자가 되어 혼자서 해결해야 하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인해 받는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무도 없는 집안에서 대화를 상실한 채 혼자 지낸다는 건 감옥 그 자체였다.

근육을 사용하지 않으면 몸이 굳는 것처럼 언어도 유통하지 않으면 결핍이 생긴다.


어느 날 아들이 내게 말했다. 아빠가 쓰러지고 난 뒤, 엄마의 행동이 무척 급해졌다고... 자신이 운전하는 승용차 문을 열고 나갈 때 몇 번이나 위험을 감지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뒤로 기억력만 흐려진 게 아니라 성격까지 급해졌음을 알았다.

그랬구나.... 그동안 나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있었구나...

생각해 보니 급하게 집을 나서고 나서 전기 스위치를 껐는지 문단속은 잘했는지 걱정이 된 적이 많았었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스스로 나를 관리하기로 했다. 천천히 생각하고 천천히 움직이고 천천히 걷자. 앞서가는 사람의 속도에 맞추지 말고 나만의 속도로 살아야겠다.


지금껏 집 안의 소리를 담당했던 TV의 전원을 껐다. 대신 책을 소리 내어 읽었다. 브런치에 올라온 작가들의 글도 소리 내어 읽었다. 묵독이 액자 속의 그림을 멀리서 감상하는 거라면 소리 내어 읽는 독은 그림과 더 가까이에서 물감의 냄새를 맡고 작가의 눈으로 보는 피사체를 함께 바라보는 느낌과 비슷했다.


꽃을 사서 집 안을 꾸몄다. 늘 그렇지만 꽃에서는 신비한 에너지를 느낀다. 방치해 둔 화단 한편을 꽃으로 꾸몄더니 자꾸만 눈길이 그리로 향한다.


친구들과 수다도 필요하다. 그동안 나를 걱정해 준 친구들과 만났다.


"나 살이 너무 빠졌지?"

"이뻐, 이뻐, 그래도 이뻐 "


이 나이에 듣는 예쁘다는 말은 몇 시간쯤 수다를 떨어도 될 만큼 에너지를 주는 말이다.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미장원에 들렀다. 그동안 왜 이렇게 뜸했냐며 반색을 하는 미용실 원장님, 멀리 여행이라도 떠난 줄 알았다고 한다.


지난 8개월 동안은 오지를 여행하는 것보다도 다이내믹하였다. 남편이 중환자실과 입원실. 재활병원을 거치는 동안 나의 삶은 전투였다. 이제 평화를 찾았으니 흐트러진 나를

재정비하는 시간이다.


멀리 돌아서 제 자리로 온 지금, 기억하나도 떨구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걸어가야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