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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1553호에 사는 세 명의 남편들

by 연희동 김작가


힘듦과 지루함, 둘 중 어느 게 더 견디기 어려울까?

병원에 입원하고 첫 일주일간은 두통과 오심 구토로 힘들어했다. 아픔으로 고통스러워할시간은 저 혼자 비켜가곤 했다.

오심과 구토가 멈춘 이 주일 째는 잠복하고 있던 지루함이 슬슬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칠월의 낮은 도대체 몇 시간이나 이어지는 건지 언제 봐도 해는 중천에 떠 있다


시간이 되면 항생제 주사를 매달아 주는 간호원외에는 눈앞에 커튼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다.

맥없이 누워 떨어지는 링거 방울만 세어 보다가 문득 지루함을 견뎌내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소우주의 행성에 갇혀버린 듯한 이 방의 지루함에서 탈출하려면 우선 나를 둘러싸고 있는 커튼부터 젖혀야 한다. 나는 내 앞에 늘어져 있는 커튼을 젖혔다. 반바지를 입은 남자 세 명이 AI처럼 묵묵히 각자의 방에서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다.


이방에는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여자환자가 있다. 나야 물론 용감하게 혼자 지구에서 이 행성으로 왔지만 저들은 모두 짝이 있다. 그들 남편은 용케 서로 연배가 비슷해 보였다.

저들은 지난 밤동안 나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만든 소음의 원인 제공자들이다. 이제는 나의 지루함 탈출을 위한 대가로 내가 쓰는 글의 모델이 되어줘야 한다


어린 시절. 내 친구네는 읍내 터미널 앞에서 쌀가게를 했었다. 어떤 날은 친구엄마 대신 친구가 가게를 지키기도 했다. 가끔 친구집에 놀러 가면 함께 가게를 지키며 우리는 재미있는 놀이를 했었다.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특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람 구경이 참 재미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제부터는 내 앞에서 움직이고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이 지루함을 조금은 줄여볼 참이다.


행성 1553ㅡ1 호 남편


일주일 전 내가 이곳 행성에 처음으로 발을 들였을 때 만난 첫 번째 인물이다. 연령은 오십 대 중간쯤 되어 보인다.

침상에 누워있는 부인의 얼굴은 볼 수가 없기에 처음에는 어머님을 간병하러 온 줄 알았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존칭을 썼기 때문이다. 한참 후에 면회를 온 딸이 환자에게 엄마라는 호칭을 써서 그때에야 부부인 줄 알았다.

그만큼 1호 남편은 조용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로 부인에게 무슨 말을 하지만 존칭 외에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 방에서 간호원 호출 신호를 가장 자주 하는 사람이다.


"석션을 해주셔야겠네요." "레볼라이저(산소호흡치료) 시간입니다" "진통제 좀 놔주세요" "소변줄 좀 봐주세요"


귀찮을 정도로 요구를 하지만 수시로 드나드는 간호사들은 친절하다. 1호 남편의 부인은 이곳에서 가장 오래 입원을 한 환자라고 했다. 그 곁에서 꾸준히 간병을 하는 모습이 참 대단해 보였다.


어느 날은 마침내 부인과 대화하는 내용이 또렷이 들려왔다.


"당신이 아픈 건 알아요, 하지만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혼자서도 하도록 노력해 봐요 누워만 있지 말고 움직여 보도록 해요"


이 말을 존칭을 쓰지 않고 말하면 분명 상대에게 힐책하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평행선을 긋는 말투, 기승전 조곤조곤한 말투, 나는 그게 질책인지 다정다감인지 헷갈렸지만 저런 말투라면 절대 부부싸움은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행성 1553ㅡ2호 남편


2호 남편의 직업은 목사님? 장로님? 아님 전도사나 권사님일까? 아무튼 매우 진실한 기독교인 임에는 틀림이 없다. 식사 시간마다 2호의 방에서는 기도소리가 들렸다.


"주시옵쇼셔, 하나님... 병든 자의 아버지 가난한 이의 아버지시여, 영광의 하나님, 하늘에서 땅끝까지...."


아무튼 2호 부부의 식사는 그렇게 열정적인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쳤다. 그래서인지 식사 시간이 남보다 더 길었다.

2호 남편은 주방직원들이 빈 식기를 다 거둬 간 뒤에도 한참이나 후에 본인이 직접 두 개의 쟁반을 겹쳐 들고 멀리 배전실까지 식사 쟁반을 놓고 오고는 하였다.


보통의 키에 도수 높은 안경을 쓴 2호 남편의

포인트는 그가 신은 신발이었다.

체크무늬 칠부바지에 군청색 크록스를 신고 있었는데 그 신발에는 각종 아이템 장식이 매달려 있었다. 곰돌이. 돌고래, 알파벳 이니셜. 꽃과 나비등등등...멀리서 보면 마치 꽃무더기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2호 방은 바로 내 침상의 맞은편에 있기 때문에 나는

커튼 아래로 화려하게 장식된 크록스 신발을 매일 볼 수 있었다. 다만 교회 남편이 그 신발을 신고 걸어올 때 신발에도 마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 상대의 시선을 발등에 멈추게 하는 마력, 귀여움은 나이를 거스른다는 마력,

크록스가 크록스했다.


1553-3호 남편님의 버라이어티 한 모습은 다음에 공개됩니다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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