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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붉은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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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희동 김작가 Mar 19. 2020

전쟁의 반대는 평화가 아니라 일상입니다


작년 여름. 지루한 일상을 글로 써 두었습니다. 요즘 그 글을 읽어보니  지루한 일상이 아니라 평온한 일상이었습니다, 적어도 이 글을 쓸 때 나는 요즘처럼 두렵지는 않았으니까요


                                                           



파리채를 내 오른손이 닿는 적당한 곳에 놓아 두었다. 아까부터 머리 위로 뱅뱅 돌아다니는 파리 한 마리가 신경이 쓰인다. 이제 한 번만 더 날아와 성가시게 군다면 날렵하게 파리채를 휘둘러 잡을 것이다.

          

아침에 편도가 부어서 열이 난다고 손녀 아이가 잠깐 집을 다녀갔다. 그때  아이의 열을 식혀 주고 젖은 수건을 빨아서 널어 두었는데 그새 햇볕에 뽀얗게 말라 가고 있다. 널어놓은 빨래 하나로 우리 집 뜰은 한가한 시골집 풍경이 되었다

참, 아이의 열은 식었는지 물어봐야겠다.

열은 어때?

해열제를 먹였더니 지금은 괜찮아요

괜찮다니 다행이다. 냉장고에서 얼음 하나를 꺼내 입에 넣고 오드득거린다.

잡지책 한 권을 꺼내 들고 거실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웠다. 그림만 볼 요량이다. 최근에 새로 맞춘 다초점 안경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두 번이나 다시 교정을 했는데도 초점이 흐리다. 고객님은 난시가 심해서 어쩔 수 없습니다. 죽어도 자기의 기술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젠 그 가게에 안경을 맞추러 가는 일은 더는 없을 것이라고 다짐하며 눈을 가느스름하게 떠야 또렷이 보이는 안경을 찾아 썼다.

                                                           



화병에 꽂아 둔 꽃이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이 눈에 거슬린다. 해바라기는 예쁘기는 하지만 줄기가 연해서 물에 담가놓으면 쉽게 무르는 게 흠이다.

며칠 전 앞 집 애기 엄마가 해바라기 꽃을 한 아름 선물하였다. 젊은 사람이 신통하게도 내가 꽃을 좋아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전에는 보랏색 함박꽃이 수북하게 핀 화분을 선물한 일도 있었다. 하기야 꽃을 싫어하는 여자는 드물겠지만 어쨌든 그 마음이 너무나 고맙다 언제 한번 집에 초대를 해야겠다.

그런데 차 한잔만 마시자고 하기엔 너무 성의가 없고 식사를 하기엔 그쪽에서 부담을 가질 것이다. 나와 비슷한 연배라면 비 오는 날 부침개를 부쳐서 함께 먹어도 좋고 삼겹살을 구워 소주 한잔을 곁들여도 좋을 텐데 내 딸 또래의 젊은 부부이다 보니 초대하기가 망설여진다.

                                                                         



언제 왔는지 강아지. 또찌가 내 옆에 웅크리고 누워있다. 사람이나 강아지나 엄마 젖을 오래 먹고 자란 새끼는 건강하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또찌는 16년 전에 동생댁이 데리고 온 강아지다. 함께 태어난 다른 형제들보다 몸집이 왜소해서 아무도 입양해 가지 않은 채 자기 엄마 곁에서 일곱 달을 살다가 나에게로 온 강아지다. 

오랫동안 엄마 젖을 먹고 자라서 그런지 지금껏 건강하게 살고 있는 또찌는 열여섯 살 노견답지 않게 아직도 내 눈에는 강아지로만 보인다. 어려서는 하얗고 곱실한 털 뭉치가 걸어 다니는 것 같더니 나이가 들면서 얼굴에 눈물자욱이 얼룩지고 털도 엉성해서 귀여운 옛 모습은 사라졌다. 하지만 가족 중에 나를 제일 좋아해서 집 안에서는 항상 그림자처럼 내 곁을  따라다닌다.

                                                                 



잡지는 도무지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고 있다. 나는 보다가 던져둔 소설책을 꺼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은 이 전에 영화로 본 적이 있는 소설이다. 그래선지 소설을 읽는 동안 자꾸만 영화 속 배경이 오버랩된다. 하지만 역시 영화보다는 소설을 읽는 게 더 맛깔난다.

올해로 나이 100세가 되는 알란은 곧 이어질 자신의 생일파티를 피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양로원을 탈출한다.

그가 신고 있는 슬리퍼를 ‘오줌 슬리퍼’라고도 하는데 어느 연령대에 이른 사내들이 슬리퍼 끄트머리 이상으로 오줌발이 뻗지 않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라는 걸 책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영상으로는 클로즈 업으로 대신했던 '오줌 슬리퍼'를 그저 구두도 챙겨 신지 못 할 만큼 다급한 상황으로 보았는데 소설을 읽으면서 남성성을 잃은 노인의 슬픔을 대변하는 소재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설의 진도가 제법 빠르게 나가고 있다. 이미 영화를 통해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100세 노인네가 저지르고 다니는 해프닝에 혼자 키들거리며 웃고 있는 나를 발목 아래 누워있던 강아지가 빤히 쳐다본다.

                                                                              



거실 창문에 쳐 둔 커튼이 바람에 나부낀다. 작년 여름의 살인적인 더위를 생각하면 올여름도 만반의 준비를 해 두어야겠다. 우리 집 에이컨은 올 해로 26년째 되는 연륜이 꽤 많은 가전제품이다. 요즘처럼 가볍고 날렵하고 스위트 한 디자인에 비하면 탱크처럼 무겁고 볼품없지만 매년 여름마다 차가운 바람을 아낌없이 만들어 주는 성실한 제품이다. 하기야 일 년  중에 한 여름 무더위에나 가동하는 날짜를 계산하면 그 정도는 버텨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우리 집을 고치러 온 한 인부가 우리와 똑같은 모델의 에어컨을 사용하고 있는 집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삼청동에 있는 제법 잘 사는 부잣집이었는데 집을 수리해 주러 갔다가 오래된 에어컨을 사용하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고 한다.

저거 살 때는 꽤 비쌌죠? 비싸게 산 물건이라서 못 버리는 게 아니라 제 할 일을 꾸준히 잘하고 있는데 버릴 이유가 없었던 것뿐이다. 아마 그  아저씨도 그런 뜻에서 한 말은 아니겠지만 나는 비싼 값을 하지요,라고 응수했다.

                                   

                                                  

                                                                   



주변이 조용해서 인지 쇠파리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작은 날개에서 나는 소리치고는 가장 큰 데시벨이 아닐까..,마치 고장난 기계소리처럼 내 신경을 건드리며 집중력을 방해한다. 살며시 파리채를 끌어당기고 기회를 노려본다. 하찮은 파리 하나라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면 묘한 의지가 생긴다. 내가 둔한 건지 상대가 날렵한 건지, 이리저리 피해 날아다니는 파리를 상대로 싸우기가 힘들었다. 나는 전격적으로 일어섰다. 오늘 하루 중 가장 격렬하게 움직이는 시간이다,


놀리듯 날아다니는 파리를 잡기 위해 거실의 문을 모두 닫았다. 아무리 용감한 쇠파리라고 해도 한번쯤 날개를 쉬어 줄 것이다. 그럴 때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덮치려는 계획이다. 그러면 그렇지, 파리의 소리가 갑자기 멈추었다. 놈은 지금 어디에선가 나를 응시하며 전의를 다짐하고 있을 것이다.

매의 눈으로 파리를 찾아보았다. 거실 방충망 문에 앉아서 바깥의 청량한 공기를 섭취하고 있는 놈을 발견했다. 먹을 것을 발견한 배고픈 파충류처럼 온 신경을 집중하여 파리채를 휘둘렀다. 여태까지의 날렵함은 어찌하고 쇠파리는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파리에게 입혀 주기에는 아까운 신비한 빛의 푸른 벨벳옷을 입고 있는 놈이었다.


죽은 파리가 나동그라진 거실 바닥에는 읽다가 만 소설책이 바람에 저절로 페이지가 넘어가고 있다.

하루가 참 길다.



PS: 이렇게 쓸데없이 한가한 날이 빨리 오길 기다리며 발행을 누릅니다. 코로나 19라는 게 없었다면 소중함을 몰랐을 어느날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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