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니문 뒤에 허니문

새 기분을 기다릴 필요 없다

by 이아침

순풍이 불 때가 있다. 질 좋은 빙판 위를 스케이트를 타고 미끄러지듯이. 이럴 때는 사는 게 쉽고 즐겁다. 문득문득 행복하다. 블루베리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 먹고 싶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내 개의 정수리에 코를 박고 어린아이 땀 냄새 같은 시큼함과 고소함을 맡다가 와락 껴안을 때.


하지만 순풍은 멈춘다. 그럼 손수 스케이트 날을 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이때 안 해본 짓을 하려고 한다. 작년에는 카페를 한 달 동안 닫고 혼자 발리에 갔었다. 비싸고 큰 결정이었다. 하지만 보폭이 꼭 클 필요는 없다.


올해는 도서관 오픈런을 했다. 아침에 카페를 열기 전에 동네 도서관에 갔다. 나를 다른 물에 담가본다. 한 시간 삼십분 남짓 머물 수 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아주 짧은 시간도 아니다. 8시에 여는 열람실에서 책을 읽다가 9시에 디지털실이 열리면 가서 일기를 썼다. 글을 묻히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튀김 가루를 묻히듯 활자 위를 데굴데굴. 조금 부지런 떨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충족된 상태에서 일하러 가니까 컨디션도 좋다. 새 기분이 오기를 기다릴 필요 없다. 하지만 열람실에서 보는 단독주택 단지의 풍경도 그다지 설레지 않는 날이 온다. 이 감정이 끝도 아니지만. 날을 바꿔낄 차례인 거다.


도서관 다음은 러닝이었다. 원래 아침에 집 앞 산책로를 걸었다. 도서관에 다니느라 안 하다가 모처럼 하려니 3km가 멀게 느껴졌다. 시동을 껐다가 다시 걸면 다 그렇다. 봄기운이 나를 걷게 했다. 나 말고도 여럿을.

첫 러닝은 걷다가 뛰다가 했다. 뛰었다고 하긴 부족하지만 걷는 것과는 달랐다. 좋았다. 두 번째 러닝을 했다. 첫 번째보다는 수월했다. 문득문득 생각에 잠겨서 달리고 있는 걸 잊었다. 잠깐이지만. 첫 번째 러닝 때는 달리고 있는 걸 잊을 수 없었다. 잠수와 비슷하다. 러닝도 소설처럼 맨 처음에는 훅훅 느는 걸까? 저기까지만 다시 저기까지만 하며 안 쉬고 뛰었다. 첫 번째 달리기와 고작 세 번째 달리기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러닝 크루에도 가입했다. 아직 특별한 일은 없지만 새로운 얼굴들을 알게 되고 숨이 차게 달려 보고 생활에 새로운 바람이 분다. 광장에서 둘씩 줄지어 달리면 행인들이 쳐다본다. 러닝 후 출발 지점으로 들어올 때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고 하이파이브를 한다. 그 모습을 한 아저씨가 휠체어에 탄 할머니를 모시고 다가와 구경했다. 그들이 구경하는 건 젊음이었다. 다리 위에는 버스킹을 하는 팀도 있었다. 어르신들이 요즘 애들은 참 사는 것처럼 산다고 생각하는 게 느껴졌다. 사실 버스킹 팀도 러닝 크루 사람들도 사는 것처럼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러닝도 점점 뜸해졌다. 필라테스를 끊었다. 처음 해보는데 재밌고 하고 나면 개운했다. 50분 동안 아무 생각 하지 않고 집중하는 게 좋다. 뛸 때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필라테스를 할 때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척추 중립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안 쓰던 근육을 써서 근육통이 있다. 묘하게 기분 좋은 통증이다. 근육의 실감이기도 하다. 아침에 필라테스를 하고 카페를 여는 것도 좋다. 하루가 카페로 꽉 차는 게 아니라 앞뒤로 다른 생활이 있는 게. 브라탑과 레깅스 위에 바람막이를 걸치고 거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것 자체를 즐긴다.


필라테스도 심드렁해지는 날이 올 테지. 삶을 밀어주던 새바람이 처음만 못해도 그러려니 한다. 스케이트를 벗어 날을 간다. 이번엔 무엇을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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