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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씨 Aug 31. 2023

미지의 공포보다 차라리 낯익은 고통을

몇 살 즈음에는 취직을, 결혼을, 출산을 해야 한다고들 한다. 앞에는 '응당'이 생략되어 있다. 이 '응당'을 거칠게 풀어쓰면 '남들처럼'쯤 되겠다. '응당'의 민낯이 '남들처럼'이라니 뭐랄까 위엄을 잃는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 진득이 생각해 볼 시간 없이 스텝 바이 스텝을 밟아 나간다. 응당 해야 하는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건 출근길 지하철 계단에서(한시가 급한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트에서도 걷고 있는데) 멈춰 서있는 꼴이다. 


어느 출근길 당신은 문득 이 모든 짓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먹고살려고'라는 명확한 이유가 갑자기 불충분하게 느껴진다. 먹고사는 방법이 이거뿐일까? 왜… 사는 걸까? 뒤에서 사람들이 밀려온다. 우두커니 서있는 당신을 걸리적거려한다. 자칫하다 늦는다. 다시 걷는다. 인파에 휩쓸린다. 진저리나지만 편안한 인파 속으로.


긴가민가 하는 길도 여럿이 가면 안심되듯이(서로가 서로를 따라가고 있을 수 있지만) 사회적 스텝을 따르면 '평균은 하고 있다'는 생각에 내심 마음이 놓인다. 잘 살고 있는지 불안해지면 서른한 살 연봉이나 자산 따위를 검색해 보고 안도하거나 낙담한다.


아빠도 내게 시집가라고, 동생에게 취업하라고 닦달한다. 그러다 환갑에 애 대학 간다. 다 때가 있는 법이야.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응당 그렇게 살아야 하고 그게 행복의 길이라면, 대다수가 스텝 바이 스텝 행복의 길을 걷고 있는데 어째서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을까? (여기서 행복이 유쾌를 말하는 것도 아닌데) 


출근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물결을 이룬다. 확실히 하나의 길처럼 보인다. 길 밖에 있는 몇몇도 보인다. (사실 다르게 사는 사람들도 꽤 많지만 동선이 겹치지 않기에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간혹 보이는 이탈한 점일 뿐 물결을 이루고 있진 않다. 길처럼 보이진 않는다.


우리가 줄지어 가는 이 길(취직/결혼/출산)은 좋은 길도 나쁜 길도 유일한 길도 아니고 하나의 길일 뿐인 거 아닐까? 가본 사람이 많은 길. 리뷰 없는 곳이 악플 섞인 곳보다 두렵듯이 우리는 미지의 공포보다 차라리 낯익은 고통을 택하는 게 아닐까? 직장인의 월요병처럼 누구나 고개를 끄덕여주는 고통을, 다 그렇게 산다 생각하면 씹어 삼킬 수 있는 고통을 말이다.


그럼 퇴사/비혼/딩크의 길을 가는 사람이야말로 용기 있게 진짜 삶을 사는 걸까? 그것도 하나의 길일뿐이다. 하지만 물살을 거스르는 선택을 할 때는 자기 자신과 또 타인과 논쟁해야 한다. (왜 결혼하냐곤 묻지 않지만 비혼이나 딩크를 선택한다면 수없이 설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치열하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퇴사나 비혼이나 딩크가 아니라 '생각'과 '선택'이다. 학교 다닐 때 들었던 외우지 말고 이해하라는 말처럼(왜 삶에 대해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따르지 않고 선택하고 싶다. 숙제하듯이 살고 싶지 않다.


한국인들은 생각을 합의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생각이 다르면 못 견디고(얘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데) 설득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보편타당한 생각이, 보편타당한 삶이 있다고 믿는다. 애당초 사람들은 성향도 환경도 경험도 가치관도 다른데 어떻게 하나의 길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의 길을 정답처럼 여기는 건 게으르고 위험하다. 내가 잊지 않고자 하는 건 길이 여러 갈래라는 것, 어느 길로든 갈 수 있다는 것. 혼자 가는 식당이라면 별로더라도 내가 고른 곳이 별로인 게 낫다. 누가 맛있다고 해서 갔는데 별로라고 투덜거리는 것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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