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양복을 갖춰 입고 출근하는 아빠를 상상할 수 없다. 퇴근 시간이나 월급날을 기다리는 아빠도 휴가 결재를 기다리는 아빠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장사를 했다. 자기가 자기를 부렸다. 수모도 영광도 개인 회생도 건물도 자기 것이었다. 불도저처럼 살았고 밥장사로 이제 동네에서는 어깨 피고 산다. 아빠는 뻔한 걸 싫어한다. 가게 앞 주차장에 '주차장'이라고 쓰지 않는다. '차 버리는 곳'이라고 쓴다. 좋은 차라도 흔하면 시시해한다. 하지만 자식은 흔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취업 준비에 지친 여동생이 뭐라도 하고 싶다며 은행에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다. 보수는 좋은 편인데 배울 일은 고사하고 할 일이 없다고 했다. 잡일이나 하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앉아있는다고. "꿀 아니야?" 내가 장난치자 동생은 "고문이거든." 했다. 그저 시간을 죽이다 온다고,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수시로 든다고 했다. 세 달 뒤 동생은 무의미에 질식할 것 같다며 그만두겠다고 했다. 아빠는 배부른 소리라며 탐탁지 않아 했다. 동생은 내가 이렇게 살기를 바라냐며 속상해했다.
부모가 되면 자식 인생의 상방을 위험과 함께 열기보다는 가능성과 함께 닫는 편을 택하게 되는 걸까? 성공하진 않더라도 망하진 않기를. 남보다 처지지 않기를. 아빠가 우리 삶을 축소하려고 할 리는 없다. 카페를 하다가 좋은 사람을 만나 시집을 가고 글도 쓰며 살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모양 빠지지 않게. 자기 그늘 아래 데리고 있다가 다른 그늘로 토스하고 싶은 것 같다. 결혼식에서 딸의 손을 넘겨주듯이.
아빠가 "너희는 사는 게 뭔지 몰라." 하고 말했을 때 비아냥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또 사실이라고 느꼈다. 아빠는 자식을 이제 그만 떼놓고 싶어 하면서도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게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내 나름대로 분투하고 있지만 나는 '사는 공포'에 질려본 적은 없다. 삶의 여러 가지 맛 중 어떤 맛에 대해선 소문으로 들은 것이다. 하지만 삶의 어떤 면을 아직 맞닥뜨리지 않았다고 해서 젊은 애들은 죄다 애송이인 걸까? 삶의 모든 면면을 지금 다 알아야 할까? 사는 게 뭔지 알기 전에는 사는 시늉일 뿐일까?
몇 년 전 휴가를 갔을 때 아빠는 여행 유튜브를 보면서(젊은 부부가 외국에서 여행을 다니며 캠핑카에서 살았다.) 너희도 재밌게 좀 살아보라고 했다.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카페에 있는데 어떻게 재밌게 살란 말인가 뾰족해졌다. 그러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 쪽으로 추가 기울었다. 나는 그 말을 목걸이처럼 걸고 다녔다. 지내다 보면 걸고 있는 것도 잊곤 했지만 푼 적은 없다. 이따금 목걸이를 만지며 되뇌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
어느 게 아빠의 진심일까? 뻔하게 살기를 바랄까 아니면 뻔하지 않게 살기를 바랄까? 아마 자식이 아닌 젊은이가 묻는다면 아빠는 재밌게 살라고 할 것이다. 그는 모험가이다. 자식 일이 아니라면. 돌이켜 보면 내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야망으로 눈을 빛내며 일을 꾸밀 때 아빠는 내심 흡족해했다. 남동생이 꿈이 아니라 스케줄을 가지고 있을 땐 꿈이 커야 뒷산에라도 오르는 법이라고 말했다. 아빠의 1지망은 뻔하지 않게 살기다. 2지망을 1지망인 체 하는 경우도, 2지망을 1지망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흔할 뿐.
내가 하려는 일을 부모가 기껍게 지지하지 못한다면 나의 기세가 약하기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조리 쏟아붓겠다는 기세가. 모험가 흉내를 내는데 모험가다운 면모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일에 미쳐있을 때 우리는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못한다. 미쳐야 미친다는데 나는 너무 제정신이다. 내가 기세를 가지고 달려든다면 상대가 나를 안심시켜 주기를 바랄 것 없이 내가 상대를 안심시킬 수 있다.
아침에 조깅을 하면서 장가하의 <그건 니 생각이고>를 들었다. 조깅 끝자락에 들었는데 좋아서 한 바퀴 더 돌고 싶었다. 전에 흘려 들었던 부분이 들어왔다.
이 길이 내 길인지 니 길인지 길이기는 길인지 지름길인지 돌아 돌아 돌아 돌아 돌아가는 길인지는 나도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몰라 너도 몰라 결국에는 아무도 몰라 그대의 머리 위로 뛰어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너처럼 아무것도 몰라
아빠가 내 머리 위로 뛰어다닌다 생각하진 않지만 나보다 삶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내게 삶의 정수를 알려줄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빠와 일 하면서 내 인생을 내 머리가 아니라 아빠 머리에 의탁했던 것 같다. 부모라 할지라도 나보다 맹렬히 내 삶에 대해 생각할 순 없는 데 말이다.
아는 것의 총합이나 내공은 아빠가 월등하다. 하지만 안 가본 길에 대해선? 모른다. 아빠도 나도 안 가봤기 때문이다. 내가 카페를 한 달이나 닫고 떠나도 될까? 좋은 선택일까? 모른다. 미래에 대해선 공평하게 무지하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알아? 아빠의 목소리가 들린다. 똥이라고 100% 확신하시나요? 아니면 쉿.
이참에 장기하에게도 물어보자. 제가 생업을 멈추고 떠나는 게 맞을까요? 모르죠. 떠나면 어떻게 되고 안 떠나면 어떻게 되는 데요? 떠나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고(좋을 수도 그저 그럴 수도 나쁠 수도) 안 떠나면… 똑같겠죠. 똑같길 바라요? 아뇨. 그는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본다. 나는 방금 가상 장기하와의 대화로 개운해졌다. 가상 장기하는 내가 장기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오해로 만든 것뿐이지만, 장기하의 탈을 쓴 나일 뿐이지만 뫼비우스의 띠를 끊어주었다. 검이 아니라 가위로 싹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