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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씨 Oct 17. 2023

굶주린 스펀지

당신에게 가장 강렬한 시절은 언제인지? 가장 환한 시기 혹은 가장 어두운 시기일까? 잘 모르겠다면 자주 이야기하거나 떠올리는 시절은? 나는 스물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다. 그 시절 나는 삶이 계속 확장된다고 느꼈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면 스물한 살이 오는 것이 아니라 스무 살 이후가 온다'는 김연수의 문장을 읽고 갸우뚱하는 사람과 끄덕이는 사람이 있다고 할 때 나는 끄덕이는 행운아들 중 하나였다. 스물은 스물 하나와도 달랐다. 


청춘이라고 부를 만한 시간이었다. 대학에서 만나 그 시절을 함께 통과한 친구 희 덕이다. 우리는 흥청망청 놀았다. 어느 밤에는 잠 못 이루고 뒤척거렸다. 우리는 살아있었다. 훌륭한 점 없이도 멋진 시간이었다. 연애도 전체에서는 작은 부분인 초반의 기억이 짙고 촘촘하듯이 젊음도 그런 것일까? 공기까지 봉인된 시절은 스무 살뿐이다. 지금도 몇몇 날들의 공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희와 훌쩍 벚꽃을 보러 간 밤의 공기랄지.


그 시기를 톺아보니 그때는 외국에도 일 년에 두 번씩은 나갔다. 자극점도 많았던 셈이다. 스무 살 여름에 가족들과 간 일본 패키지여행이 시작이었다. (이때 희는 카톡 알림말에 모모야 잘 다녀와 하고 적어 두었다. 왜? 스무 살에는 그런 짓도 한다. 귀엽고 따스한 기억.) 첫 해외여행이라 감도가 높았고 그래서인지 마냥 좋았다. 


관광버스 안에서 창밖을 보며 일본에서 한 일 년 살아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일 년 중 십 년 뒤에도 기억할 날은 얼마나 될까? 소소하더라도 음미한 순간은 쉽게 휘발되지 않는다. 그런 날, 그런 순간을 부러 만드는 게 인생의 곳간을 채우는 방법일지도. 일본에서 메모도 많이 했는데 나를 끄적거리게 했던 사람들, 그 시절의 주연들은 모두 퇴장했다. 알면서 자꾸 잊는 것. 삶은 흘러간다는 것.


이학 년 때는 친한 선배가 중국 요성에 교환 학생으로 있어서 그곳에 여럿이 놀러 가기도 했다. 아침에 밖에 나갔는데 광활한 도로에 오토바이 떼들이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장면이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이국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몇몇 선배가 삼 학년은 지루하다며 교환 학생을 추천했다. 희와 나는 운 좋게 함께 중국에 갔다. 중국에 뜻이 있는 건 아니고 외국에 살아 보고 싶었다. 영어권에 비하면 중국 교환 학생은 노려볼 만했던 것이다. 돌아볼 때마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선택 중 하나다.


하얼빈에 도착한 날 기숙사 앞 가게에서 감자튀김과 너겟을 사 먹었다. 우리 둘이 들어가면 꽉 차는 구둣방만 한 컨테이너였다. 하얼빈을 떠올리면 초반에 그곳에 갔던 게 생각난다. 우리에게 수줍게 말을 건네던 할아버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서 웃던 우리. 셋이 쑥스럽게 웃으며 모여 앉아 있던 시간. 그 할아버지는 아직도 그곳에 계실까? 어쩌면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동생이 캐나다에 삼 개월 어학연수를 떠났다. 떠나기 전 날 함께 저녁을 먹으며 생각했다. 내일은 동생 인생에 특별한 날이 될 것이다. 동생은 설렘과 긴장 속에서 출국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 첫날이 자기 안에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것까진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내일이 동생에게 특별한 날이 되리라는 걸 알고 동생을 바라보는 기분은 묘했다. 


나는 하얼빈에서 이 시절이 내 삶에서 멀어질수록 빛날 것을 알았다. 그 예감은 맞았다. 문지를수록 광이 나는 것처럼 돌아볼수록 특별해졌다. 틀린 예감도 있다. 여름방학에 남자친구가 놀러 와 내몽골에 갔다. 우리는 좌석 대신 이층침대가 있는 버스를 타고 하염없이 달렸다. 얼마 전까진 내가 지금 가는 곳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도 몰랐다. 일 년 전만 해도 중국에 살게 될 줄 몰랐다. 나는 스물두 살이었고 삶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번지고 있었다. 


나는 이 들불이 나쁘지 않았다. 두렵고 아름다웠다. 평생 함께 산 가족들은 한국에 있고 희는 하얼빈에 남아 있었다. 나는 아래 칸에서 배낭을 품에 안고 곤히 자고 있는 남자친구를 바라봤다. 우리는 러시아 국경지대에도 갈 예정이었다. 나는 앞으로 또 어디에 가게 될까? 어디까지 가게 될까? 삼 년 뒤 집 코 앞에서 카페를 하게 될 줄은, 그곳에서 칠 년이 넘도록 일할 줄은 전혀 몰랐다. 희와 안 보고 살게 될 줄도 전연 몰랐다. 


우리는 졸업 후 유럽 여행을 갔고 우리의 시간은 끝났다. 여행을 잘 마친 듯했지만 얼마 뒤 희가 나와 한국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전에 준 편지에는 아줌마가 될 때까지 이렇게 지내자고 쓰여있었는데…. 희가 편지에 쓴 말도 진심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우리가 (특히 내가) 누적한 것들이 시한폭탄이 되어 똑딱똑딱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동안에도 끝은 다가온다.


한 달 유럽 여행을 갔다 온다고 아빠의 바람처럼 철이 들진 않았다. 내 기대처럼 내 안의 지각 변동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좋았고 재밌었지만 생각보다는 삼삼한 경험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손에 쥐고 돌아온 게 있다. 나처럼 영어도 못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친구와 함께일 뿐인데 둘이라는 이유로 혼자일 때보다 강했다는 것. 우리는 용감한 덤앤더머였다. 둘이선 일이 꼬여도 웃겼다. 시트콤처럼.


거리에서 이상한 사람들이 말을 걸어올 때 무서웠지만 희와 함께라 웃겼다. 만약 혼자였다면 그 상황은 그저 공포였을 것이다. 대체 뭐가 웃기단 말인가? 하지만 둘이선 어지간한 상황은 한 편의 콩트로 만들어 놀았다. 우리끼리 웃겨서 찍은 동영상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디서 웃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런 순간들이 많았다. 나는 결혼을 생각할 때 희와 무서워하면서도 낄낄거렸던 것을 떠올린다. 가까운 타인은 서로를 견뎌야 하지만 다른 것들을 견딜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을. 


유럽 여행에 다녀온 지 일 년도 안 돼서 나는 동생들을 데리고 바르셀로나에 갔다. 그다음 해에는 남자친구와 방콕에 갔다. 원래 헤어지고 혼자 가려고 했으나 연인 사이 일이라는 게 그렇듯(뭐 하나 생각처럼 되는 게 없듯) 같이 가게 됐다. 나홀로 여행은 다음을 기약했다. 그리고 카페에 묶였다. 그렇게 칠 년. 얼마 전에야 아빠가 나를 묶어 놓은 게 아니라 참담하게도 내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내 인생이 내 손에 달렸다는 사실은 당연한 동시에 놀랍고 기쁜 동시에 두렵다.


졸업반 때 친해진 영이라는 선배가 있었다. 나보다 세 살 많을 뿐이었지만 뭐랄까 맏며느리감이었다. 밥벌이와 글쓰기, 음주가무를 모두 해내는 야무진 선배였다. 내가 선배와 선생님께 푸껫에서 사 온 선물을 주며 '생각나는 사이가 돼서 좋았어요.' 하고 말했을 때 선배는 선생님이 흘려 들었을까 봐 '생각나는 사이가 돼서 좋았대요.' 하고 한번 더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자기가 받은 게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선배는 나를 이완시키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일깨워줄 때가 많았다. 호탕한 웃음 뒤로 언뜻언뜻 여린 면이 비쳤다. 우리는 한동안 붙어 다니며 두 번째 스무 살을 보냈다.


나는 유럽 여행에서 영 선배 생각이 났다고, 선배가 갔으면 더 많은 것을 느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쇄빙선을 타고 유빙을 보고 왔는데 자기도 그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선배는 별 말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딴에는 칭찬이었지만 선배에게는 그 말이 어떻게 다가왔을까? 선배는 스펀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스펀지 같은 상태였던 것 같다. 굶주린 스펀지. 요즘 내가 그렇다. 


동생들과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있을 때 선배에게 카톡이 왔었다. 나는 '저 지금 바르셀로나에 왔어요' 하고 보냈다. 오기 전 우여곡절이 생략된 그 문장은 글로벌하고 쿨해 보였다. 일에 묶인 선배는 그 카톡을 봤을 때 어떤 마음이 들었으려나. 사람은 돌아가면서 상대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자리)에 앉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선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희가 나를 떠나자 비로소 내가 떠났던 남자친구의 자리에 앉아본 것처럼. 그게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느껴본 것처럼.


온종일 카페에 있으면 구경꾼이 된 것 같을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구경하는 기분. 휴무에 터미널이나 기차역에 가면 살아있는 것 같다. 바깥세상의 모든 것들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나는 굶주린 스펀지다. 스펀지가 되고 보니 스펀지 상태의 인간은 슬픔을 머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당찬 영 선배가 불현듯 슬픔에 잠기곤 했던 게 떠오른다. 나도 종종 울고 싶어 진다. 내 처지를 비뚤게 해석하고 저질 결론을 내려서 그럴 때도 있지만 그냥 울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내가 슬픔을 머금은 상태라는 걸 느낀다. 벼르고 벼른 발리에 가면 모든 것을 빨아 들일 것만 같다. 내가 오래전 유럽 여행에서 떠올렸던 영 선배처럼.


며칠 전 하얼빈에서 쓴 일기를 읽었다. 사진 속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해맑다. 마감 후 설거지를 하면서 조금 울었다. 그 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기 전 너를 실망시키지 않을게 말했다. 세상에 찍은 발자국은 줄었지만 정신의 대륙은 더 넓어졌다고, 흘러가다가 잠시 고여있는 중이라고 이제 헤엄칠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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