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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모씨 Sep 03. 2023

쓰는 맛


브런치를 시작한 지 열흘 남짓 됐다. 브런치란 이런 세계군, 킁킁대는 중이다. 다섯 편의 글을 올리는 동안 쓰는 즐거움이 되살아났다.


함께 시작한 친구 름도 잃었던 입맛이 돌아오듯 쓰는 맛이 돌아왔다고 한다. 한동안 심드렁하던 름이 다시 사는 맛이 생겼다고, 제대로 사는 것 같다고 해서 기뻤다. 쓰는 맛을 되찾는 건 사는 맛을 되찾는 것. 쓰는 맛이 있는 한 우리는 어지간한 슬픔은 볶아먹고 졸여먹고 튀겨먹을 수 있다.


브런치를 쓰자 곳곳에서 '브런치거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일상이 풍미 있어진다. 다람쥐처럼 쓸거리를 주우며 생활했더니 볼주머니가 빵빵하다. 한 보따리의 쓸거리가 있지만 새치기해서 이 글을 쓰고 있다. 갓 몸 담은 사람에게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 초심자의 감각은 머지않아 쇠한다.



브런치를 쓰기 전에는 브런치를 읽지 않았다. (원래 그런가? 쓰고자 사람들이 모여 서로 읽어주는 곳인 것 같다. 작가와 독자라기보다 문우들 같고.) 나는 웬만해서는 핸드폰으로 글을 읽지 않는다. 종이책에 길들어 있기도 하고 핸드폰은 화면이 작아 답답하고 눈이 금세 피로하다. 솔직히 말하면 양질의 책을 읽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글을 내보이고 한 편씩 쌓아가는 연습을 하려고 브런치를 시작했다. 브런치를 쓰면서 브런치를 읽지 않는 건 얌체 같다. 책을 쓰겠다면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을 본 적 있는데 조물주에게 귀는 됐고 입이나 두 개 주쇼 하는 것 같았다.


당기는 데로 몇 편 읽어 보았다. 블로그보다는 더 정련되고 책보다는 덜 정제된 느낌이었다. 책이 호텔이라면 브런치는 에어비앤비 같다. 한 명 한 명의 삶, 생활, 생각. 글 안으로 들어서면 그 사람의 집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집에 온 타인만 맡을 수 있는, 정작 집주인은 모르는 냄새. 가만 생각해 보면 타인의 이런 내밀한 이야기를 어디서 들을까 싶다. 쓰기라는 펌프질을 통해서만 퍼 올릴 수 있는 것.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브런치체'가 보였다. 물론 다양한 목소리가 있지만 내게 브런치 하면 떠오르는 목소리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사회의 일원이면서 개인으로서의 자신, 사적인 영토도 지키고 있는 사람일 것 같다. 그녀라면 이 글의 제목을 이렇게 지을 것 같다. '브런치체를 아시나요?'


'브런치를 쓰며 생각한 것들'이나 '퇴근하면 출근합니다. 브런치로.'도 브런치 스타일이지만 '브런치, 왜 하시나요?'나 '너 혹시 브런치 하니? 한밤중 친구의 카톡', '엄마 일기 써요? 아이가 물었다.' 같은 구어체 의문문에서 더 두드러진다. 브런치투랄까 브런치톤이랄까 각기 다른 사람이 쓴 글에 하나의 결이 있다. 보드랍다.


름과 농담 삼아 브런치체로 말하기도 하고 혼자 제목을 짓기도 했다. 이를테면 카페에서 손님이 이쑤시개를 건넬 때 이를 글감 삼아 본다. '손님이 이쑤시개를 건넸다. 전 쓰레기통이 아닌데요.', '이쑤시개가 싫어진 이유', '다 쓴 이쑤시개를 주는 사람의 머릿속엔 뭐가 들었을까?' 제목을 달고 머릿속으로 몇 자 적다 보면 괜찮아진다. 해보시기를!


브런치체는 브런치라는 이름과 잘 어울린다. 가끔 봐도 편한 오랜 친구와 모처럼 만나 브런치 먹으며 할 법한 이야기들. (혹시 브런치가 그래서 브런치인가 찾아봤는데 그건 아니다. 브런치를 시키면 빵 한 조각도 플레이팅 해서 내어주듯 작가들의 생각과 경험을 브런치 안에 아름답게 담아 드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내가 느낀 브런치의 온도다. 며칠 짜리 경험이지만 첫인상은 그렇다.


브런치에서 제목과 사진은 글의 외연 같다. 외모가 시시하면 클릭하지 않으므로 독자를 만날 수 없다. 분량은 키. 키가 너무 작거나 너무 크면 도망간다. (나는 대체로 3m 이상) 많은 독자와 만나려면 제목과 사진, 분량, 레이아웃 등 외모도 고루 가꿔야겠다.







브런치는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글이다 보니 읽으나 마나 한 글이 되고 싶지 않아 오래 잡고 있게 된다. 쓰고 생각하고 다시 쓰면서 글이 한없이 길어진다. 시간도 하염없이 흘러간다. 발행한 글 모두 비대해져서 부분만 올린 것이다.


글이 물리도록 읽고 고친다. 검열한다. 타당한지 과하진 않은지(이미 과하다.) 부실하진 않은지 한쪽만 보고 있진 않은지 등. 급기야 이 글은 지금의 나일뿐 나중에 이 글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무슨 대국민 담화 연설문도 아니고…



나는 친구의 글이 그저 그런 날에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건 그 애의 끝이 아니니까. 하지만 내 글이 그저 그런 날에는 실망한다. 이게 겨우 나 같아서. 자기 자비가 필요하다. 그래야 계속할 수 있다. 아침에 조깅을 하다가 그 결함, 과함, 쏠림이야말로 고유한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으로 불완전한 자야 말로 나라는 생각이.


어떤 작가를 좋아할 때 나는 그 작가의 어떤 작품을 특히 좋아한다. 그 작품 때문에 그 작가를 좋아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를 다른 작가와 구분하게 한, 특별한 인상과 여운을 준 작품이 있다. 그의 모든 작품을 공평하게 좋아하는 게 아니다. 그가 어쩌다 혹은 자주 그저 그런 글을 쓴다고 해도 아주 좋았던 글이 있는 한 나는 그를 여전히 좋아한다. 그가 쓴 그저 그런 글이 아니라(이런 건 어차피 잊는다.) 그가 쓴 좋은 글로 그를 기억하기 때문에.


고로 계속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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