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지지부진하다'라고 썼다가 고친다. 인생은 지지부진하다. 인생의 속성 같다. 지지부진함 때문에 죽진 않지만 서서히 지친다. 암이 아니라 만성 질환이다. 쓰러뜨리지 않고 제 발로 멈추게 한다. 삶이란 암중모색이라는 걸 알지만 어둠이 짙은 어느 날에는 제자리만 돌고 있는 게 아닐까 두렵다.
엄마가 트럭에서 양말을 사 왔다. 가끔가다 동네를 도는 트럭이다. 그 아저씨 양말 장수를 30년 했대, 엄마가 말한다. 내가 휘둥그레지자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네, 한다. 한번 발 들인 곳에서 빠져나오는 게 어렵다는 걸 나도 느끼는 바다. 어쩌다 보니 하게 돼서 할 줄 아는 일의 완력을. 하지만… 그래도… 다른 도둑질을 배워볼 수도 있었잖아요. 남의 인생인데도 아쉽다. 그는 양말 장수 말고 또 무엇이 될 수 있었을까?
보도 섀퍼의 책을 읽다가 이런 질문과 마주쳤다.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다면 얼마나 걸릴까? 좀 멍했다. 7년째 카페를 하고 있고 잘 해보려 꼼지락거려 왔지만 인수인계한다고 치면 이 일은 한 달이면 배운다. 1년 차와 7년 차의 내공이 같진 않지만 그 세월만큼의 격차는 없다.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어느 날에는 회사원은 연차가 쌓이면 승진도 하고 자연히 성장할 것만 같다. 아빠는 회사의 부품으로 있는 한 회사원도 마찬가지라고, 대한민국 대부분의 일은 세 달이면 배운다고 말한다. 아빠는 내게 내재화되어 있어서 다음 대사도 들을 수 있다. 차이는 일이 아니라 네가 만드는 거야.
이 카페 장수에게 내세울 점이 있다면 양말 장수만큼은 아니지만 꽤 오래 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이 중학교 1학년이 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아득하고 아찔하다. 받아쓰기를 하던 어린이가 육두문자를 쓰는 청소년이 되는 시간. 한 가지 일을 오래 하는 것은 멋지다. 그것이 단련일 때. 인내에 그칠 땐 슬프다.
하던 일을 하던 식으로 계속한다고 성취가 따르진 않는다. 출퇴근으로 돌파구를 뚫을 순 없다. 편의점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일해서 부자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양말 장수도 카페 장수도 마찬가지다. 하루종일 일하는 사람은 돈 벌 시간이 없다는 록펠러의 말이 떠오른다.
하루쯤 일을 멈추고 판을 보자. 여태 해온 게 이거라, 하는 매몰 비용 타령도 멈추고 내가 뭘 매몰하고 있는지 들여다보자. (저런, 구덩이 안에 내 젊음이 흙을 뒤집어쓰고 있다.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있다.) 여태 해온 게 이거지만 사실 세 달이면 배울 수 있는 일이라면 작은 시간 때문에 큰 시간을 지불하고 있는 중일 수 있다. 어쩌면 저 일도 세 달이면 배울 수 있다면 다른 도둑질을 할 용기가 날 지도 모른다.
물론 때려치우는 게 능사는 아니다. 지금 하는 일이 마지못해 하는 일일 때 말이다. 마지못해 하는 일은 마지못해 사는 기분이 들게 한다. 자신과 안 맞는 일을 하면 못생겨진다고 하던데 그런 것 같다. (퇴사한 친구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던 게 떠오른다. 피부 속부터 차오른 광채였다. 자기 삶을 되찾은 자에게서 나는 광채.) 자기 낯빛을 살피자. 일이건 연애건 낯빛은 나침판이 되어 준다.
낯빛을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니라면 하고 있는 일에 진심을 다해 달려드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이 방법을 택했다. 싸락눈 같은 반복이 아니라 뭉칠 수 있는 반복을 한다면 진입장벽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특별한 양말 장수가, 카페 장수 이상의 카페 장수가 될 수 있다. 뱅뱅 돌지 말고 더듬더듬 나아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쳇바퀴에서 빠져나오는 것. 그런데 쳇바퀴에서 내리면 나아가고 있어도 쳇바퀴에서보다 느리게 느껴진다. 쳇바퀴에선 헤맬 일이 없고 속도감이 있기 때문이다.
삶의 방향을 정한 뒤에도 지지부진한 이유 중 하나는 결심이 물러서다. 요즘 새벽에 일어나려다 다시 잠들 때가 많다. 결단하지 않고 생각해서 그렇다. 생각은 언제나 다른 생각이 치고 들어올 수 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어둑한 방에 알람이 울리면 생각한다. 근데 꼭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할까? 비몽사몽간 강아지를 품에 끌어안는다. 따듯하고 고소하다. 이게 행복 아닌가? 사실 더 자도 출근에 지장 없는데… 그러다 잠든다. 여지를 주지 않는 연습, 결단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후회할 즐거움 말고 절제의 즐거움을 누리자. 절제의 즐거움이란 평양냉면처럼 슴슴하고 그 맛을 알려면 시간도 좀 걸리겠지만.
나는 늘 터닝 포인트를 갖고 싶어 한다. 여기서부터 다른 삶, 하고 찍 선을 긋고 싶어 한다. 끊임없이 다시 태어나고 싶어 한다. 월요일을 1일을 새해를 각종 절기를 기점 삼아 오늘부터 진짜! 하고 외친다. 한 후배는 이름이 세 개다. 본명과 필명과 개명한 이름. 자신과 쓰는 사람을 분리하고 싶었거나 새로운 이름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기대했을 것이다. 후배를 보니 이름이 세 개나 된다고 해도 그 애는 영락없이 그 애다. 나도 똑같을 것이다. 새 이름 정도론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듯하다. '나'라는 쳇바퀴만큼 지겹고 탈출하기 어려운 게 있을까? 그렇담 우리는 영원히 자기 안에 갇혀 있어야 하는 신세일까?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터닝 포인트 좋다. 환골탈태도 좋다. 하지만 뼈를 바꾸어 끼는 것보단 스트레칭으로 매일 조금씩 근육을 늘리는 게 더딘 듯 보여도 더 빠를지 모른다. 이번 삶 동안 내가 머물 나 자신을 늘려보는 거다. 이런 식의 변화는 극적이지도 않고 지지부진함과의 지지부진한 전투가 될 테지만 말이다. 가라앉을 듯한 폼으로 헤엄치는 것, 그러나 가라앉지는 않는 것, 허우적거리면서도 나아가는 것이 성장의 민낯 아닐까? 다시 고친다. 인생은 지지부진하게 '흐른다'.
요 며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었다. 해야 할 일들을 두고 포르르 달아나는 날. 멀리 가지도 못하면서. 뭐든 바쁘다고 못하고 한가하다고 더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모든 게 마음의 문제. 나아진 점은 이런 날을 망한 날로 못 박지 않고 일이 손에 안 잡히는 날 정도로 넘길 수 있다는 것. 오늘 이 글을 썼기에 망한 날은 아니다.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티도 안나는 것 같을 때 우리는 멈춘다. 아주 짧은 거리가 아니고서야 가는 길에 목적지가 보이는 경우는 없다. 도로는 대개 비슷비슷하며 도착하기 전까진 한없이 이어질 것 같다. 인생이란 도로 대부분이 막히고 지지부진하다는 걸 안다면 심드렁한 시기도 건널 수 있지 않을까? 그저 그런 날들을 견디는 자가 특별한 날을, 인생의 정점을 가질 수 있다. 포르르 달아난 곳에서 내려다보며 쓰는 글. 고쳐 쓴다. 인생은 지지부진하게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