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을 짓게 한 한라봉

생활 속 이야기

by 수국

1. 우리 집

제주감귤도 새들새들 쪼그라들어 막을 내릴 때쯤 울퉁불퉁 묘하게 생긴 생전 처음 보는 과일이 포장 한번 부하게 하고 고고한 척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뭐예요?

“한라 봉입니다.”

‘한라 봉’ 이란 이름은 처음 들었다. 모양도 탯줄 덜 끊어 튀어나온 배꼽처럼 불룩 나온 것이 맛은 어떨지 궁금했다. 차떼기로 나왔기에 만만하게 봤더니 그 한라 봉 몸값이 장난이 아니었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 있다는 말에 놀라 도망간 호랑이처럼 조용히 그곳을 떠나 왔지만 그 한라봉이란 게 자꾸만 궁금해졌다.


그 뒤 어느 날 대형마트에서 초면이 아닌 한라 봉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그 비싸던 한라봉이 오늘은 빛깔도 더 좋고 굵기도 하고 상품이 훨씬 더 좋은데 가격은 어떻게 이렇게 더 살까! 그새 가격이 내렸나 값 살 때 맛이나 한 번 보자 싶어 얼른 몇 개를 담아서 계산대로 가져갔다.

이것저것 계산을 하던 직원이 “한라봉엔 가격표가 안 붙었네요” 가격표 부쳐 오란다 이건 또 뭔 소린가 하고 갔더니 웬걸. 그럼 그렇지 “문철네 복”에 무슨 이런 호사를 누릴까


하나 가격인 줄 알고 콧노래 부르며 주워 담았던 한라봉 가격이 100g 가격이라니 착각은 자유라지만 이럴 수가, 아직은 괜찮은 시력인데 너무나 반가운 마음에 한라봉 앞에서 흔들려 버렸나? 보나 마나 과분한 가격이 나올 것 같았다. 속 따가워하며 먹다 체하느니 차라리 먹지를 말자. 살며시 내려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돌아섰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무슨 과일 하나 값이 저렇게도 비싸냐, 한편 가격이 조금만 비싸도 맘대로 쥐어 보지도 못하는 자신의 형편 처지가 속상하기도 하고 스스로 좀생이가 되어가는 소시민의 삶이 얄미워지기도 했다.


그래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한번 색다른 것 먹는다고 때깔이 달라질까?

“쥐구멍에도 볕 뜰 날 있겠지”

“홍콩에서 배 들어오면 그때 보자”던 남편이란 벽을 향해 혼자 주절거리며 속으론 주먹질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한 짓을 뒤돌아 생각하니 또 우습기도 했다.


혼자 간직하려 했던 한라봉 사연을 어느 날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다 말해버렸다. 한라봉 몇 개도 맘대로 못 사 먹고사는 내가 ‘바보 등신 쪼다’라고 씩씩거렸다. 한라 봉으로 인하여 온 식구 한바탕 웃었지만 가장이라는 책임을 진 한 사람은 은근히 마음이 불편했든지 그 후 며칠이 지나고 땡칠이라 할 만큼 아침 일곱 시 땡 하면 출근하고 저녁 일곱 시면 퇴근하여 귀가 시간이 거의 일정한데 연락도 없이 귀가 시간이 늦어지더니 박스를 하나 어깨에 메고 씩씩하게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 한라봉!

뜬금없이 한라봉 한 박스를 선물 받았다. 도대체 이놈의 한라봉이 뭐 그렇게 귀하신 몸이 길래 나를 두 번이나 울리고 이제야 내 품에 안기는고. 저녁을 얼른 먹고 온 식구 둘러앉아 그 비싼 한라 봉을 개봉하는 시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맞이했다. 하나하나 얌전히 까서 한쪽씩 맛을 음미하는데 역시나 맛은 상큼하고 깔끔한 것이 몸값 비싼 한라봉이 맛은 있었다. 지금도 한라 봉하면 ‘날 두 번 울린 한라 봉’이란 그때 그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한라봉이 나오기 시작하던 초창기 때 이야기다.


2. 언니네

지금은 한라봉이 낯설지도 않고 그렇게 비싼 몸값 자랑할 만큼 고고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집집마다 털어놓으면 사연은 다 있나 보다. 코로나로 인하여 설전에 엄마 생신에도 못 가고 설 명절에도 못 가고 아흔셋 연세에 독거하시는 모친께 죄송스러워 얼마 전에 새해인사 겸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딸 세 자매가 모이고 가까이 사는 장남이 합류하니 우리 남매 절반이 모이게 되었다. 여기서도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한라봉 사연이 터져 나왔다.


제일 맏이인 언니와 형부의 사연 인적 생질 조카가 설 명절이지만 방문도 못하니 외삼촌댁으로 한라봉 한 박스를 택배로 보내왔더라는 것이다. 그걸 뜯어보니 일단은 포장부터 눈길을 끌었고 싱싱하고 맛있게 생긴 한라봉을 우리 형부가 그냥 덮어두고 볼 수만은 없었겠지 “내 먹을 건데 비싸도 좋은 것 사 먹자” 는 주의인데 공짜로 생긴 한라봉에 입맛을 다시며 신나서 먹자고 했단다.


그 소리에 우리 언니는 좀 있으면 애들

올 텐데 “애들 오면 같이 먹지요” 한마디

툭 던진 게 문제의 발단이 되어서

“내가 애들보다 더 못하냐”라고

“치사하게 먹는 걸로 마음 상하게 한다” 고

“내가 이제 한라봉 먹나 봐라”

그러면서 화를 내고 삐치더라고

“그 큰 등치에 등치 값도 못하더라”며

지나간 이야기지만 두 배우의 극한 연기에

모두 한바탕 웃을 수 있었다.


3. 오빠네

시누이들의 거침없는 이야기에 신이 난 올케언니도 한라봉 이야기에 할 말이 많았는지 입을 열자 가만히 있던 오빠가 지나간 일이지만 다시 열 받아서 어찌나 현장감 있게 이야기를 이어가는지. 이 집은 며느리가 한라봉 한 박스를 보내왔는데 올케는 나름 누구랑 같이 나눠 먹을 건지 요랑은 다 해 놓았겠지만 늦은 밤 오빠는 수면제를 먹어도 잠은 안 오고 배도 출출하던 차에 그놈의 한라봉이 생각났는지 그것 하나 먹어 보겠다고 까던 중에 올케언니에게 걸려서


“애들 오면 같이 나눠 먹으면 좋을 텐데” 그랬다가 밤중에 난리 난리 생난리가 났다고 애들이 우리보다 못 먹고사는 것도 아니고 애들 애들만 챙기고 서방은 무시했다고


“나는 한라봉 하나보다 못한 인간이다”


라고 묘비에다 새겨두라고 해놓고 안 되겠다며 미리 새겨두고 갈 거라고 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다시는 한라봉 안 먹는다”며


누구는 속상해서 하는 소리가 듣는 우리는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한라봉 때문에 속상해서 병난 사람도 있지만 듣는 우리는 박장대소 병이 다 날아갈 듯했다.

그 한라봉!

박스가 좀 더 크게 나오던지 숫자가 좀 더 많았으면 너도 먹고 나도 먹고 그런 일 없었을 텐데. 엄마들이란 뭐 좀 귀한 것 있으면 애들이랑 같이 나눠 먹고 싶은 그 모성애는 자식들이 다 자라도 끝이 없는 듯 집집마다 한라봉에 얽힌 사연이 하나씩은 다 있었다.


4. 동생네

언니 오빠들의 티격태격하며 사는 이야기를 다 듣고 있던 동생이 “뭐야 뭐야 그 한라봉 한 박스씩 사 줄 테니 속에 있던 이야기 다 털어봐” 그러면서 옆에서 부추기고 있었다. 고작 한라봉 하나면 세상 조용할 일을 아래위 입술에 잠금장치가 없는 관계로 입술이 열리는 바람에 집집마다 한라봉 파동이 말이 아니었나 보다.


가만히 보니 동생네가 제일 평안한 걸로 인정. 제부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 조용히 넘어갔는지 모르지만 누구나다 큰일에는 이심전심 협동도 잘하지만 소소한 일 소소한 말 한마디에 천하를 잃은 것처럼 서럽고 억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의 말씀은

아내들이여, 애들보다 남편 먼저!

한라봉보다 소중한 남편 서럽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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