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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국 Feb 07. 2023

반쯤 탄 꽁초를 줍고 말았다

포크밸리 광고 포스트를 보는데 영순할머니의 선한 눈매가 떠오른다. 속살이 비칠 듯 토실토실한 연분홍 돼지의 순함이 영순할머니의 부드럽고 순수한 이미지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악의 없이 착한 사람도 장수한다는 보장은 없는 모양이다. 담배 한 개비 피우지 않던 영순할머니는 골초 남편 덕분이었을까 폐암말기라니. 순한 만큼 조용히 자연의 한 조각으로 돌아간 영순할머니를 생각하면 골초 남편에게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다.


철저히 혼자가 된 태석할아버지는 오늘도 뭘 입을까 옷장을 열고 멍하니 서있다. “옷차림이 반듯해야지 구지레하게 다니면 할멈 욕 먹인다.”던 그 말이 번개 치듯 번쩍 떠오른다. 고운 색깔이라고는 없는 옷장 속은 우중충하고 헐렁하다. 홀아비 냄새가 날까 봐 쓰다 남은 향수를 칙칙 뿌리고 코를 들이밀며 냄새를 맡아본다.


임기를 마친 주인과 함께 구석에 별 볼 일 없이 끼여있던 넥타이에 눈길이 멈췄다. 한때는 몸의 일부분으로 밀착되어 다녔던 넥타이다. 옛 추억 속으로 빠져들자 희고고운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아내의 따뜻함이 목덜미를 감싸는 듯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아 두 손으로 옷장 문을 꼭 닫는다.


두 다리는 후들들 힘이 다 빠지고 풀썩 주저앉아 생각해 본다. 있을 때 잘할걸 언제까지 얼마나 더 이렇게 무너져야 단단하게 설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시간이 흘러도 적응력은 점점 더 떨어진다.  


뒤에서 할멈이 부르는 듯하여 돌아보면 할멈 없는 빈자리는 더 넓고 휑하기만 하다. 덩그러니 홀로 남은 자신을 인식할 때면 허한 마음을 잠재울 수가 없다. 옷장문을 다시 열고 옷을 챙겨 입는다. 번들거리는 정수리는 중절모로 가렸다. 봐줄 사람도 들어줄 사람도 돌아올 대답도 없는 허공을 향해 ‘이만하면 됐지’ 할멈에게 허락이라도 받는 듯 혼잣말을 하며 길을 나선다.


건강을 위해 담배   끊고 오래오래 살자던 할멈은 어딜 그리 바삐 가셨소. 주름진 얼굴, 주름진 , 주름진 입으로 잔소리하던  소리마저도 그리운 날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을 깨닫는다. 차라리 끝까지 철들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 홀로서기가 이런 기분일 줄은 정말 몰랐네.


건강하고 당당한 노인이고 싶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어깨 펴고 반듯하게 걸으려 애를 쓴다. 마음은 한없이 휘청거리고 애수에 젖은 눈은 길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에도 마음이 간다.


허리를 굽히고 반쯤 태우다만 꽁초 한 개비를 줍는다. 살며시 주머니에 넣고 몇 발자국 가다가 또 하나를 더 줍는다.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만지작 거리며 생각에 잠긴다. 눈 딱 감고 이걸 한번 피워 봐 말아. 봐줄 사람은 없지만 고민에 빠진다.


길에 버려진 담배꽁초는 누군가의 손을 통해 치워야 할 텐데. 버리는 손 따로 있고 치우는 손 따로 있는지 왜 그렇게 버리는지 모르겠다. 반듯한 노신사 체면에 좋은 일까지 하는 듯 보이지만 길에 마구 버려진 담배꽁초를 주워서 버리자는 마음은 아니다.


 꽁초는 약해진  할아버지의 의지를 흔드는 중이다. 결정하지 못한 묘한 마음은 피워 말아 갈등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꽁초를 주웠다는  이미 절반은  것이다. 한참을 걷다가 길가 가로수에 기대어 허리를  들어 올리며 꽁초에 불을 붙인다. 한번 쭈욱 빨아보니 재채기 한번 하지 않는  실력은 살아있다. 바로  느낌이야. 한참을 뻐끔거리며 ‘푸후연기를 내뱉는다.


지나가던 낯선 할멈이 담배 연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힐끔거린다. 아휴, 이게 뭐라고 버려진 걸 주워서 입에 물어야만 했을까. 위생적이지도 않고 건강에도 무익한 담배가 뭐 그리 아쉬웠던가. 외로움을 못 이겨 생각났던 것일까. 한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나약해진 의지는 신사체면이 구겨지는 것도 무시해 버렸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자책하며 갈등한다. 죽었던 할멈이 벌떡 일어나 입을 실룩거리며 올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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