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국 Nov 23. 2022

그때 그 자리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 했는데


여름 내내 큰 그늘을 선물했던 느티나무 잎도 초록초록 생기 넘치던 은행잎도 가을이 되니 각자 색깔로 물들었다. 때가 되니 물든 단풍은 광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밟히고 찢기며 바싹거리는 낙엽으로 말라간다. 푸석푸석한 낙엽은 작은 바람결에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린다.


어른도 아이도 낙엽 따라 걸어간 그 길 끝에는 낙엽을 등진 중년 남자가 돌기둥 위에 앉았다. 아직은 물들 때가 아닌 듯 푸릇푸릇한 중년 남자다. 그 남자가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짠하게 한다. 세상에서 얼마나 열심히 살다가 왔는지 뭐 하다가 온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이 좋은 가을날 홀로 떨어진 낙엽처럼 혼술 중이다. 남들 출근시간에 생탁 빈병 세 개는 땅에 뒹굴고 네 병째는 반쯤 남았고 발아래 바닥엔 빈병과 새우깡 한 봉지도 널브러져 있다. 땅바닥에 술상을 차려 놓은 그 남자는 개미들과 함께 새우깡을 나눠먹는 사이인가.


귀에는 이어폰이 꽂혔고 그 줄은 남자의 움직임에 따라 살짝살짝 흔들렸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곤 한다. 불 붙인 담배 한 개비는 한 모금 쭉 빨아들일 때마다 손가락 사이에서 빨갛게 피어났다. 허공을 향해 푸우 품어낸 담배 연기가 사라지기도 전 그 남자는 맥없이 고개를 떨구고 또 고개를 들며 피시식 웃었다. 그렇게 막살아 낼 것 같지 않은 그 남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블랙이다.


세상에 이런저런 일들도 다 많지만 무슨 사연인지. 낙엽처럼 흔들리던 그 남자의 그 자리는 긴 여운을 남겼다.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말끔하게 잘 정리된 그곳을 보면 다행이라 생각하며 편하게 길을 간다. 그런데 또 그 자리에 생탁 빈병 네 개와 먹다 남은 새우깡 봉지와 종이컵 한 개가 흩어져 있다. 그 모습은 낯설지 않았고 익숙하게 눈에 와닿았다. 지난번과 똑같은 생탁병에 안주는 역시 새우깡 그때 그 자리. 아마도 그 남자의 푸념이 머물다 간 자리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외롭고 답답해 보이는 그 남자의 가을은 빨리 지나가고 겨울이 오기 전에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해 본다. 서걱서걱 살얼음 낀 생탁병과 씨름하는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씁쓸한 가을 아침이다.

작가의 이전글 생강 다시 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