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이나 당했어요

일상생활 속 이야기

by 수국


선택의 여지없이 몽땅 이사를 했더라면 당연히 포장이사를 했을 텐데 전자제품과 가구들은 뒤에 들어와 살게 될 조카에게 인수인계하고, 최대한 가볍고 깔끔하게 짐을 줄이는 게 목표였기에 묵은 짐을 정리하느라 울며 겨자 먹기로 우리 손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이사비용은 포장이사의 반의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몸의 피로도는 몇 배로 더 높아졌다.


내 몸이 힘든 만큼 절약이 되던가 내 몸이 편한 만큼 비용을 지불하던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이래저래 서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게 아닐까. 옛날처럼 올망졸망 용달차에 짐을 싣고 이사를 하고 짐 정리를 하려니 수납할 공간이 없다. 많지 않은 짐이지만 대충 쌓아놓고 살려니 난감하다. 냉장고 없이 살아보기, 세탁기 없이 살기, 침대 없이 바닥에서 잠자기, 소파 없이 바닥에 앉기. TV 없이 조용히 살아보기 등등. 새로 구매한 가구와 가전제품이 들어오기까지 불편을 참아내며 살아가려니 아이고 소리가 절로 나지만 그런대로 살만하다.


모든 물건이 자유롭게 구석구석 흩어져 있거나 쌓여 있다고 땀 흘린 후 씻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죽을 맛이겠지만, 막힘없이 잘 나오는 수돗물과 팽팽 잘 돌아가는 가스보일러의 협력으로 따뜻한 물은 맘껏 쓸 수 있다. 샤워기에 키 큰 해바라기 샤워기까지 씻고 닦고 깔끔 떨며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다.


이사 온 첫날 해바라기 샤워기를 보며 지난 일이 생각나서 혼자 웃음이 나왔다. 몇 년 전 베트남 하롱베이에서 있었던 일이다. 패키지여행 일정에 지친 둘째 날이었다. 뜨거운 물이라도 뒤집어쓰고 빨리 쉬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바빴다. 어제는 룸메이트가 먼저 씻었으니 오늘은 기필코 내가 먼저 씻고 누워야지 생각했다. 상대가 원한다면 당연히 또 양보하겠지만 고맙게도 먼저 씻으란 그 말에 얼씨구나 샤워실로 들어갔다.


큼직한 해바라기 샤워기가 ‘어서 오세요’ 하며 기다리는 것 같아 무척이나 반가웠다. 옷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뜨거운 물이 쫙 쏟아질 걸 기대하며 샤워기 아래 서서 세상 다 얻은 것처럼 흐뭇해했다. 그런데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샤워기에 물이 나오게 할 조작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어디를 당기던 비틀던 돌리던 뭔가 작동을 시켜야 물이 콸콸 쏟아질 텐데, 흔히 생각하는 그런 수도장치가 아니었다. 뭐지? 마음만 바쁘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샤워기 앞에서 이렇게 당황스럽기는 또 처음이다. 어제 그 호텔과는 또 달랐다.


내 머리로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서 그녀를 불렀다. 어제 처음 만난 룸 메이트 여자들끼리라지만 알몸 상태로 도움을 요청하려니 부끄럽고 민망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그녀 역시나 이해가 안 된다며 작동 불가 옆방에 가서 배워 온다고 가더니 옆방에는 물이 잘 나오더라며 “요래 요래 하라”고 했는데 하면서도 결국은 옆방 것과 구조가 다르다고 해결해 주지를 못했다. 나만 기계치인줄 알았더니 둘이 똑같은 수준이었다. 룸메이트가 호텔 로비에 가서 이야기해야겠다며 문을 열고 나갔다. 어쩔 수 없이 옷을 다시 주워 입고 나와서 기다리는데 몸과 마음이 찝찝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 직원이 함께 와서 설명하며 물이 나오게 해 주었다.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가느다란 고리를 밀치며 작동을 시켰다. 어쨌거나 감사 표시를 하고는 온몸을 감싸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물과 사랑에 빠져 행복감을 느끼며 좋아했다. 그동안에 세상에나 또 무슨 이런 일이! 욕조 안에서 씻도록 되어 있는 구조인데 건식 바닥에 물난리가 난 것이다. 이럴 수가, 이해불가, 황당했다.


별나게 춤을 추며 씻은 것도 아니고 최대한 얌전히 욕조 안에서 물의 따뜻함에 온몸을 맡겼을 뿐이다.. 그런 물난리가 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잘 살펴보니 수도꼭지와 욕조 사이에 골이 있었고, 샤워기 끝부분에서 허락도 없이 탈출한 물방울들이 그 골을 따라 샤워실 바닥으로 흘러내렸던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이런 구조로 만들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골을 없애고 욕조로 바로 떨어지게만 했어도 이런 문제는 없었을 텐데 아쉬웠다.


대형 타월 소형 타월 다 동원해서 물을 닦고 욕조를 타고 흐르는 물길을 막아보았지만 샤워 한번 끝나기까지 바닥으로 흐르는 물난리를 피해 갈 길이 없었다. 차라리 하수구나 있었으면 물청소 한번 속 시원하게 해 줄 텐데. 건식비닥은 이래저래 불편했다.


명색이 호텔이란 곳에서 이틀 동안 씻을 때마다 물난리를 치며 생고생을 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보기엔 멀쩡했던 해바라기 샤워기가 얼마나 불편하게 했던지 그 여파로 해바라기 샤워기는 쳐다만 볼뿐 별로 달갑지도 않다. 베트남에서의 악몽 같은 추억도 있지만 꼭 필요하지도 않고 천천히 사용하기로 맘먹었다.


그 당시는 불편했어도 그때를 다 지나고 보니 모든 게 추억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그 여운을 되새기며 발이나 씻고 나가야지 하며 작은 샤워기를 손에 들고 수도꼭지를 여는 순간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물이 쫘악 쏟아진다. 이런 미친! 등짝 위로 쏟아지는 폭포수 물폭탄! 아이고, 사람 살려! 옷 입은 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책 없이 해바라기 샤워기에게 당했다. 의외의 냉수 폭탄에 온몸의 세포들이 바짝 긴장한다. 정신이 번쩍 들면서 약이 바짝 오른다. 세상에 이럴 수가!


한여름에도 기가 넘어가서 냉수보다는 따뜻한 물을 좋아하는 몸인데 무슨 이런 날벼락이라니 에잇 짜증 게이지 뱅글뱅글 돌아간다. 해바라기 샤워기 너 정말 이럴 수가 있어. 두 번이나 해바라기 샤워기에게 물고문을 당하고 나니 쳐다보기만 해도 저 녀석이 또 어떤 짓을 할지 두려워진다.




작가의 이전글편견의 담을 헐면 모두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