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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하게 May 08. 2017

새벽 한시 반, 버스에서의 의리

새벽 1:00. 친구의 의리

푸후후아압!


짧은 부산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 무언가를 크게 뱉어내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러자 곧 그 근방에서 '이거 뭐에요? 토에요?'하는 여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렇다. 갓 성인이 되어 술을 접한지 얼마 안된 호기심 왕성한 남자아이가 자신의 주량도 모른채 잡히는 대로 술을 마시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그 남자아이의 친구로 보이는 옆자리 여자아이는 어찌할 줄 몰라하며 이리저리 고개를 숙인채로 사과를 하며 다녔다. 남자아이의 앞자리에 앉아 토를 맞은 앞자리 여자에게, 휴지를 준 나와 내 앞자리 여자에게 진짜로 진짜로, 진짜로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온 버스에 냄새가 진동하기 전 그 여자애는 버스자리의 창문을 열었고 빌린 휴지로 남자아이가 토해놓은 것들을 덮어놓고는 다시 잠에 든 남자아이를 깨우기에 바빴다. 남자아이는 자는지 깬지 정체를 알 순 없었지만 자는 듯 눈을 감고 창문에 머리를 기댄채로 여자아이에게 ‘아, 진짜 미안해. 미안해 진짜, 와 미쳤나봐’만 반복해서 말 할 뿐이었다. 술에 취할대로 취해서 몸도 정신도 가누지 못한 채 입에서 내뱉어지는 소리는 내일 아침이 되면 기억조차 나지 않을지 모른다. 푸하핫, 몇 년 지나지 않은 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여자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남자아이는 어떻게든 술이 깨서 집에 돌아가질터이니, 어서 집에 들어가거라.' 

내가 이렇게 외쳤던 이유는 어느덧 새벽 2시가 다 되어가는 때였기 때문이다.


서울역에서 탄 버스가 어느덧 40분을 지나고 있었다. 내가 버스에 오른지 20분쯤 지났을때 그 남자아이가 토악질을 했는데 이제 곧 내릴 곳이 다 되었던 모양이다. 남자아이의 옆에 앉아있던 여자아이가 조급하게 남자아이를 깨웠다. ‘야, 거의 다 왔단 말이야. 너 혼자 집에 갈 수 있겠어?’ 조급하고 불안한 여자아이의 마음도 모른채 처음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창에 머리를 기댄채 ‘아, 진짜 미안해. 미쳤나봐 진짜. 진짜 미안해 진짜.’ 계속해서 같은 말만 반복하는 남자아이에 지친 여자아이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버스 창문에 비친 남자아이는 잠꼬대를 하는 것 처럼 여전히 몸을 가누기 힘들어 보였다. 5분쯤 지나 여자아이가 다시 남자아이를 꺠우기 시작했다. ‘역에 다와간단말이야. 내가 너 택시에 태워줄테니까 집에 갈 수 있지? ㅇㅇ동 ㅇㅇㅇ아파트 맞지?’ ‘......’ ‘택시타고 너 혼자 가. 그러고 난 갈거야’ 그러자 아무 말 없이 잠을 자는 듯 했던 남자아이가 겨우 입을 땠다. ‘아, 진짜 미안. 미안해. 니가 지금 그냥 가도 나는 진짜 할 말 없어. 와 미쳤다’ 슬슬 여자아이는 감당하기 지친듯, 아무런 대꾸도 없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했다. 나였더라면 새벽 한시반, 재미나게 놀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같이 탄 남자사람친구가 분수처럼 토를 뿜어내어 앞사람에게 토를 튀기고, 안그래도 피곤한 그 때에 집에서 오는 재촉문자를 견뎌가며 주변사람들에게 옆자리 친구의 민폐를 사과하며 또 남자아이를 집으로 보내줘야한다는 의무감까지 안아야 한다면. 여자인 친구였어도 힘들었었을 그 여자아이의 의리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나라면..글쎄 아마 내가 그 상황에 닥쳤더라면 버스 안의 여자아이처럼 몸도 가누지

못 할 만큼 취해버린 남자아이를 두고 가지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아마 같이 버스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못됐다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것이다.정말이지 꿋꿋하게 옆에 있어준 버스 안 그 여자아이는 새벽의 의리를 보여주었다.


그러고 얼마안가 역에 도착하고 나는 버스에서 내렸다.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버스에서 어떻게 일으켜세웠을지, 남자아이를 어떻게 택시에 태워서 보냈을지, 택시에서 잘 내려 집에 무사히 도착했을지 그리고 술이 깬 완벽한 아침에 남자아이는 여자아이에게 어떤 말을 했을지 또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 이 모든 것들은 알지 못하지만 그날 그 버스 안에서 여자아이가 보여준 멋진 의리는 내가 꼭 그맘때의 나를 떠올리게 해주었고 지금의 나를 한번 더 생각하게 해주었다. 의리. 다시 한 번 그날 새벽. 그 버스 안의 여자아이에게 엄지를 치켜세워주고싶다.

그리고 술은. 몸을 가눌 수 있을 때 까지만 마시는 걸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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