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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하게 Oct 05. 2016

시작과 끝의 거리

늘 그렇다.

시작은 간절하고 그 끝은 단호하다.


그를 처음 본건 지하철 역사 안쪽이었다. 먼저 온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솔직히 내가 바라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키는 컸지만 어깨는 좁은 편이었고, 자연스러운 머리스타일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왁스를 꼼꼼히 발라 세운 머리가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편안한 복장을 선호하는 나는 구두를 신은 그가 어색했고 나와는 동떨어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한걸음 두 걸음 함께 걸어 음식점에 갔고, 주문한 음식을 먹는 내내 먹는 둥 마는 둥, 매운 볶음밥을 시키면 초면에 콧물이 날 것 같아 소고기 볶음밥을 주문한 게 잘못이었다.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가게였는지, 너무 느끼한 탓에 꾸역꾸역 입 안에 밥을 밀어 넣고 있는데, 와구와구 초면에도 맛있게 밥을 먼저 다 먹은 그가 내가 먹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눈치채고는 느끼한 나의 소고기 볶음밥을 같이 먹어주는 모습에 왁스를 꼼꼼히 발라 부담스럽던 머리도, 어색했던 구두 신은 그의 모습도 모두 사라진 지 오래.


밥을 먹고 자리를 옮긴 카페에서 그는 아주 적극적이고 격렬하게 자신의 연애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뭐는 좋고 뭐는 싫고 가장 오래만났던 여자는 이미 결혼을 했으며 바로 전 여자친구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나 뭐라나. 이는 이꼬르 나와 연애를 하고 싶단 마음을 아주 열심히 표현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 그에게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굳이 집까지 데려다준다는 그의 차에 겁도 없이 냉큼 올라타고 그렇게 첫 만남은 끝이 났다.


사실 이 관계의 처음에서는 난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내가 그의 마음을 얻으려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됐고, 그저 퍼주는 그의 마음을 적절하게 받는 선에서 그쳤던 것 같다. 항상 누군가를 만나면 그를 사랑한다 생각이 들지만, 그 관계가 끝나고 나면 과연 그를 좋아하긴 했나 언제나 의문이 들었다. 물론 이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어이없게도 그 관계의 마침표는 그리도 열정적으로 마음을 퍼주던 그가 찍었는데, 그 이유 또한 어이가 없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혼자 활활 장작불처럼 불타오르다가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진 것이다. 이별의 증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나는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당연한 무의식적 반응이었다. 그저 갖고 있던 무언가가 사라질 기미가 보이면, 그것이 그다지 소중하지 않았어도 아쉽고 안타깝고 그래서 불안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뿐이었다. 예의상 한번 붙잡았다. 붙잡으면 붙잡힐 것 같아서 붙잡았다. 물론 붙잡히진 않았다.


나는 이 관계에서의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것 같다


그 후로 그가 생각 난 적도, 그의 생각을 한 적도, 아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던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관계에서의 내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것 같다. 오히려 내가 간절하게 원했던 관계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알면서도 시작되지 못했던 관계들 속의 내가 보다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비록 만남을 잇진 못했지만 그토록 애타게 주고받았던 그와 나의 마음들이 훨씬 더 오래도록 기억나고 그 관계 속의 내가 훨씬 확실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토록 간절했던 마음의 끝은 언제나처럼 단호하다. 앞서 말했던 관계의 끝자락처럼 칼같이 잘라지진 않는다. 조금 더 생각나고 전날 밤 꿈자리에도 몇 번 등장하기는 하지만 정리될 때는 순식간에 찾아오고 이는 단호하게 끝이 난다.


시작과 끝은 다르다


기대하고 고대하던 맛집을 찾아가 기다리던 그 음식을 입에 넣는 그 순간. 맛있다. 그 정도다. 그리고는 한번 간 맛집을 다시 찾아가는 일은 거의 없다. 시작은 창대하나 끝은 미약하리라- 맛집을 갔을 때 자주 느낀다. 간절하게 원했던 음식을 먹고 난 후는 그 가게를 나오는 순간 잊게 된다. 단호하다.


간절하게 원하던 직장의 쓴맛을 견디지 못해 다른 길을 찾아 나오려는 마음은 단호한 끝을 이끌어내고 이는 미련 따위 가져오지 않는다.


좋아하는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과 그 마음이 모두 달아나 버렸을 때의 단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하다. 그럴 수밖에.


시작과 끝은 다르다.

그것이 간절하게 원한 시작점이었다면 조금 덜 단호하겠지만서도, 결국은 다르다.

여태껏 그래 왔듯, 지금도 그러하듯,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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