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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과 슬픔의 끝은 사랑이 아닐까

영화<워리어>

by 오롯하게

가족은 언제나 어렵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 처럼, 가족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 잘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을 살다가 우리들은 세상으로 나온다. 말을 하는 것도, 생각을 하는 것도, 두 다리가 있음에도 걷는 법 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코와 입으로 들어오는 공기에 숨을 맡긴채 그렇게 세상과 마주한다. 걸을 수 없었던 내가 땅을 딛고 일어서게 되는 것, 머릿속을 돌아다니는 생각들을 잡아 입으로 뱉어낼 수 있게 되는 것,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고 가끔은 불만을 품으면서 싸우기도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하게되는 듯 하다. 하지만 우리가 걷고 말하며 타인과 소통할 수 있기까지, 나의 부모님은 내가 넘어지지 않게 항상 내 뒤를 지켜주셨고 내가 말을 하기까지 많은 인내를 하며 나를 가르켜주셨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에 어색해 할 나를 위해 수도 없이 나를 타이르고 달래주셨다. 이렇듯 어머니의 뱃속에 자리잡는 것 부터 세상에 나와 살아가는 것 까지.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존재를 알아차리기 힘들다. 부모님의 품 속에 있는 ‘형제’라는 또 다른 이름의 가족에게서 어색할 수 있는 타인의 모습을 먼저 마주하며 투닥투닥 그렇게 자라난다.



영화 워리어는 엉킬대로 엉켜버린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간의 갈등을 ‘격투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보여주고있다. 아주 간단명료하다. 익숙한 그림을 던져준 감독의 숨은 의미를 판단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관객들의 몫일 것이다. 수 많은 관객들 중 하나인 나는 영화 워리어를 통해 가족관계에 대한 어려움과 답답함 그리고 가슴아픈 슬픔을 생각했다. 가족이기에 형제이기에 나의 모든 것들을 이해해줄 것 같고, 그들의 모든 것들이 이해될 것 같지만 아무렴 가족이라도 완벽하게 같은 사람일 수 없기에 생겨나는 많은 갈등들의 실마리는 타인과의 갈등보다도 풀기 어렵다.


토미는 패디의 아들이며 브렌든의 하나뿐인 동생이다. 술주정뱅이었던 패디 그리고 병든 어머니와 어린 자신을 버리고 여자에게 떠난 형 브렌든에게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의 큰 상처를 얻고 등을 돌린 토미는 ‘해병대’라는 새로운 형제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던 중 작전 속에서 동료들에게 죽음을 떠넘긴 것 처럼 혼자서만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에 안타까운 죄책감을 얻게 된 토미는 죽은 동료들과 의리를 지키기 위해 링 위에 오른다. 어머니가 병든 줄 몰랐고 순간 너무나 깊은 사랑에 빠졌던 브렌든은 어린 토미와 병든 어머니를 두고 떠났었고, 이제는 3주뒤면 없어져버리는 가족과의 안식처를 지켜내기 위해 선생님의 본분을 뒤로하고 링 위에 오른다. 각자 다른 이유로 링 위에 올랐던 두 형제는 마지막 결승. 서로를 마주하게 된 링 위에서 그들이 링 위에 올라야만 했던 목적따위는 없어져버린지 오래. 도저히 형과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던 토미는 결국 형 브렌든의 품 속에서 눈물을 흘리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어떻게하면 이 엉망이된 상황을 원래대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이 강하게만 보이던 토미는 가족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용서’라는 이름의 사랑으로 묻어두게된다.


이 모든 결과는 결국 그들이 가족이었기 떄문이다. 수십년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가족에 대한 원망을 묻어둘 수 있게 되었던 것은 그가 품고있던 원망만큼이나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다. 토미와 브렌든이 서로에게 그리고 술주정뱅이에 가족을 버렸던 아버지에게 품었던 원망이 컸던 것은 그만큼 아버지를 믿었었고, 서로를 의지했으며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링 위의 형제에게 싸움의 승패는 중요하지 않았다. 동료들의 의리를 지켜고자 했던 토미의 굳건했던 마음도, 3주 뒤 사라질 가족의 보금자리를 지켜야만 했던 절박한 브렌든도, 링 위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마음아픈 주먹이 오가는 그 길지 않은 시간동안 서로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서로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사랑으로 묻어둘 수 있었다. 가족을 버렸고, 자신때문에 서로에게 등돌린 것 같은 당신의 자식들을 보면서 가늠할 수 없는 크기의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가고있는 아버지를 토미와 브렌든이 용서하게 된 것 또한 과거 아버지의 행동들을 이해해서도, 그를 받아들여서도 아니다. 그저 아버지를 사랑했을뿐.


거대한 원망과 미움의 가장 뒤에는 언제나 ‘사랑’이 있기 마련이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그저 ‘사랑’만으로 보다듬을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드 넓은 땅 위에 사과나무만 자라지 않는 것과 같이, 가족이라는 단단한 땅 위에는 언제라도 미움과 원망과 실망과 슬픔이 자라날 수 있다. 그러니 땅 위에 자라난 수 많은 종류의 아픔들보다도 그를 단단하게 뒷받쳐주고 있는 ‘사랑’이라는 대지를 딛고 일어서보자. 나 또한 지금 먹고있는 미움과 실망이라는 열매의 근원은 사랑이라는 것을 되새기려 한다. 다시 한 번 되새기려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워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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