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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하게 Feb 02. 2017

희뿌연 편안함

괜찮아, 조금 덜 또렷해도 괜찮아

가끔은 시력이 좋지 않은것에 고마움을 느낄때가 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질때, 머릿속이 터질 것 같고 마음이 꽉 막힌듯 답답할때면 안경을 벗어두고 희뿌연 천장을 본다. 너무 뚜렷하고 딱 떨어지는 생각들이 머리를 파고들어 체한듯 가슴마저 답답할때, 주변의 모든 것들마저 그렇듯 또렷하게 보일때면 딱 그만큼 답답함이 더해진다. 그럴때 안경을 벗고 희뿌연 사물들과 또렷하지않은 사람들을 보면 이런 느낌이다. ‘괜찮아, 조금 덜 또렷해도 괜찮아. 정확하지 않아도 되. 지금당장 답을 내리지 않아도 좋아. 조금 느긋해져도 좋아’ 눈을 감는것과는 다르다. 깜깜하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것이 아니라, 보이긴 하지만 또렷하지않은 그 부정확함이 무언의 위로를 던져준다. 그럴땐 좋지않은 시력이 고마워진다.


어제는 하루가 참 길었다. 오지않는 잠을 청한탓에 느즈막히 눈을 떴는데 뜨자마자 든 생각이 ‘오늘은 또 어떻게 시간을 흘려야할까’였다. 참 막막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다. 어떻게하면 보람찬 하루를 보낼까. 도 아니고 어떻게 시간을 흘려야할까라니. 요즘 퍽 막막한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어둡고 찐덕한 쥐덫이라도 밟은 느낌이 들 떄면 늘 그렇듯 난감하다. 그 찐덕거리는 시간을 어떻게 흘려야할지 대책을 찾는데에 바빠진다. 책을 읽어도, 재미있는 티비프로를 봐도, 음악을 듣고 눈을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그 끈끈하고 찝찝한 기분은 사라지질 않는다. 그렇게 이리저리 헤매고 바둥거리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밤 열한시 반이었다. 침대에 눕고 안경을 벗었다. 희뿌얘진 방안이 한결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리고는 문득 라디오를 켰는데 거기에서 흘려주는 음악들이 잔잔하게 나에게 스몄다. 그저 머릿속이 바쁘게 엉키던 하루를 한가닥씩 풀어주듯 그렇게, 차분한 공허함이 찾아왔다. 이 시간에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걸까. 오롯한 내 공간속에서마저 그 시간들을 의심하고 또 되물었다. 내가 존재하고있는가. 뭐 그런 생각들.

안경을 벗어던져 내게 비춰진 희뿌연 방이 항상 도움이 되는건 아니다. 다만 가득 엉켜버린 실타래를 중력과같은 특정한 규칙 없이 자유로워질 수 있게 해준달까. 뭐 그렇다. 그럼에도 썩 좋다. 시력이 좋아 또렷한 세상을 볼 수 있었더라면, 매일아침 뜬눈의 장님처럼 더듬거리며 안경을 찾지 않아도 되었더라면. 결코 이 희뿌연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랬다면 또 다른 편안함을 발견했겠지. 


모든것을 똑 부러지게 해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정해진 답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굳이 더 많은 것들을 정확하고 오차없이 해내야한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더 가두는 것은 아닐까 한다. 해이해지자는것은 아니다. 그저 놓아야 할 것들은 놓고 조금은 편안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것이다. 조금은 뿌연세상을 마주하고있어도 썩 나쁘지 않을까 하는거다. 오늘 한번쯤은 안경을 벗어놓고, 렌즈를 벗고. 혹은 눈이 좋다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하늘을 보고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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