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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하게 Apr 13. 2017

글감이 생각난다는 건,

글감이 생각난다는 건 좋은 일이다. 생각날때 그때그때 잊지 않도록 메모해두어야 한다. 보통은 자기 전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아, 이걸 쓰면 참 좋겠다’싶다는 생각이 자주 떠오르는데 그럴때는 깜깜한 방에서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찾아 굳이 메모로 단어 하나라도 남겨두는 편이다. 근데 그게 귀찮아서 키워드 몇개만 꼭 생각하고 아침에 바로 적자! 하면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듯이 다음날 아침 깨끗해진 머릿 속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땅을 치고 후회한다. ‘아-진짜 좋은 소재였는데, 이 망할 귀차니즘!’ 아무리 후회하고 기억을 더듬으려해도 지난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고작 몇 시간 전의 생각이 떠오를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과감하게 놔야한다. 더 좋은 무언가가 떠오를 거라는 일말의 기대와 희망을 품고.


반년 전만해도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에 그런 생각들이 자주 떠올랐다. 대부분 영화와 관련된 글감이었는데 그럴때면 민폐가 되는 줄 알면서 머리가 바닥에 닿을랑 말랑 할 정도로 고개를 푹 수구려핸드폰 밝기를 가장 낮춘 후에 한 두개의 키워드라도 남겨놔야 마음 편하게 다음 장면을 이어볼 수 있었다. 왠지 모를 뿌듯함과 함께. 그렇게 영화를 다 보고 나오는 길에 또 하나의 글감을 생각해냈다는 즐거움과 함께 저녁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떠오른 글감에 보태 좋은 글을 써낸다는것이 녹록지만은 않다. 아주 멋진 글감이 떠올랐어도 그에 덧붙일 살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머리를 쥐어 짜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썩 맘에 들진 않았지만 적어놓은 무언가에는 붙여야할 살들이 물 밀듯이 생각나는 순간도 있다. 볼품 없다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아주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보는 느낌이 드는데, 그 때 느껴지는 희열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래서 글감이 떠오르는 순간을 중요하지 않다. 귀하다고 생각되든 아니든 글이 완성되는 순간은 바로 알 수 없다. 또 그래서, 모든지 생각이 나는대로 적어놔야한다는 것이다.


요근래 글감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이것저것 신경을 쓰고 눈치를 봐야할 일 투성이인 요즘 나의 일상에는 아주 뻔하고 식상한 생각들만 머릿속을 멤돌뿐, 무언가 실마리의 끝을 잡고 떠오를 생각들이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모습을 감춘 녀석들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글감을 얻기 위해서는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보거나 옛날 영화들을 뒤적거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그저 묵묵히 기다리다가 떠오르는 글감이야말로 보석들 중에서도 아주 값진 원석이기 때문이다. 특히 아주 우연하게 만난 글감들은 그 진가를 톡톡히 드러낸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경우다. 바쁘진 않았지만 힘에 부쳐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아주 엉망진창이었던 하루의 끝, 가로등 아래 피어난 벚꽅을 보고 ‘완벽한 밤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수십장의 사진을 찍고, 눈 앞에 보이는 반짝이는 벚꽃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벚꽃은 밤이 더 아름답다.’라는. 지금은 이 글감을 가지고 글을 구성중이다. 아주 값진 녀석이다. 힘든 하루의 마지막을 완벽한 밤으로 선사해준 그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이 주어준 글감. 아무래도 책이나 영화를 통해 얻어낸 글감들에게서는 미디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크다. 그래서 나는 일상 속에서 문득 찾아온 글감을 몹시 선호한다. 보통 무난한 일상보다는 고통스럽고 힘든 순간에 글감이 잘 떠오른다는 것은 굉장히 서글픈 진실이다. 힘들어 죽겠는데도 무언가 쓸 것들이 떠오르니, 감정을 추스르고 메모장에 그 이야기들을 응축해 담아놔야한다. 서글픈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요즘은 아주 무탈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고통스러운 일상보다도 조금 더 깊고 심오한 일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인지 고통스러운 단계에 떠올라야할 글감들을 두고 지나쳐 수렁에 빠진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곧 이 수렁을 빠져나가게 되면 아마도, 분명 멋진 글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거라 굳게 믿고싶다. 아-무탈하지도 고통스럽지도 않은 이 깊은 수렁의 일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길. 나를 위해 혹은 글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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