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들과 함께하는 5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루아

by 라문숙


책상이나 옷장, 주방의 싱크대 서랍을 정리할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내가 얼마나 많은 물건들에 둘러싸여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용하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해서 처분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쓰레기통을 옆에 끼고 앉아 서랍을 뒤지기도 이미 여러 번이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것은 손에 든 낡은 필통이나 쓰다만 공책, 유행이 지난 옷,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이 내게 건네는 기억의 한 조각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물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는데 우리가 일상에서 매일 만나게 되는 익숙한 사물들이 내게 건네는 이야기들을 모아 놓은 책을 만났다. 시도만 하고 정리하지 못한 게으름을 정당화해 주기도 하는 반가운 책 한 권. '사물들과 함께하는 51가지 철학 체험'이다.


클립, 리모컨, 열쇠, 선글라스, 소금통, 스카프, 공책, 가로등, 침대, 포크, 스펀지, 휴대전화, 세탁기, 병따개, 쓰레기통, 복사기, 목걸이, 우산, 자동차, 진공청소기, 자전거, 프라이팬, 면도기, 책, 파리채 등 매일 접하는 흔한 물건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어떻게 그렇게도 많은 삶의 추억이 사물 속에 담겨 있을까?

사물 중 하나를 들어올리기만 해도 충분히 하나의 세상을 볼 수 있다. p.59


얼마나 용감해야 세상 하나를 담고 있는 사물들을 쓰레기통에 던질 수 있겠는가?

고이 접어서 차곡차곡 쌓아둘 밖에.

정리와 정돈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 준 한 문장.


공책의 두께는 기록의 두께며 시간의 두께다. 기록도 시간도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없듯이 공책도 단번에 모든 내용을 내보일 수 없다. 한 자, 한 줄, 한쪽씩 차근차근 모습을 드러낸다. 아직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새 공책이 일으키는 매혹과 현기증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새 공책은 엄청나게 많은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한 권의 공책을 글로 채운다는 것은 그 많은 가능성을 계속해서 하나 둘 배제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공책에 얼마나 많은 글을 기록하든 간에 단 하나의 가능성이 실현될 뿐이다. p. 67


그러니까 일기를 매일 쓰겠다고 약속하고서 며칠 동안 공책을 펼치지 못했다면

가능성을 여전히 풍족하게 열어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우산을 발명한 사람은 분명 시인이었을 것이다.

~

어쩌면 비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꼭 우산이 아니더라도 다른 것들을 이용해서 얼마든지 비를 피할 수 있다. 우산은 우리를 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보호한다. 물은 완전히 부차적인 문제다. 우산은 작지만 침투할 수 없고,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우리 몸의 크기에 적합한 하늘을 만들어준다. 무한한 공간이 아니다. 우산을 들었을 때 우리는 개방된 상태가 아니며, 무언가 위로부터 우리를 공격하거나 습격하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시선을 마음 편히 아래로 향할 수 있다. 우산 속에 있을 때 사고도 훨씬 더 활발해지는 것 같다. p.187


그러므로 우산을 하나 고르는 것은 내가 머물 하늘을 선택하는 것과도 같아 신중할 필요가 있다.


우산의 궁극적인 장점은 이기주의다. 우산은 이동할 수 있고, 사용자에게 규모가 적합한 그만의 하늘을 만들어준다. 더구나 이런 이기주의는 합법적이고 무해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경우는 꽤 드물다. 우산 발명가는 인간에게 각자 개별적인 공간을 부여해줄 만큼 박애주의자였을까? 그는 인간이 각자 상대에 대해 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p.188


이기주의가 장점이라면 이기심도 최대한 발휘해서 내가 고를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우산을 고를 일이다. 지난여름, 무시무시한 가격의 양산을 덥석 사버린 생각을 할 때마다 함께 따라오는 후회와 자책에서 벗어나게 해 준 문장.


여행가방에는 철학적 금욕, 에피쿠로스적인 면이 있다. 실제로 인간이 생존하는 데에는 그리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제한된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만 처신한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이 가볍고 편한 가방 하나만 가지고 살아가는 세상을 꿈꾸곤 한다. 그 가방 안에는 각자에게 필요한 모든 것, 각자가 가진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그런 세상이 틀림없이 더 나는 세상, 더 살기 쉬운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런 세상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p.195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으로 가방을 쌌던 그동안의 원칙을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물건들로 가방을 싸야겠다는 것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준 문장. 더불어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 또한 엄청나게 버려야 한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문장이기도 하다.


책장을 덮으면서 결국 중요한 건 내가 가진 물건들이 아니라 나와 그 물건들과의 관계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물건을 선택하고 사용하고 버리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참 재미있고 신선하게 이야기하는 책 한 권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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