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는 참 외롭다

김서령

by 라문숙

첫눈에 반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첫눈에 반하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마지막 장을 읽은 후에도 다 읽은 그 책을 책장에 꽂는 것이 아니라 다시 첫 페이지를 펼치게 되기 마련인데 두 번째 읽는 중에도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그건 첫눈에 빠진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그 책과의 연애가 시작되는 것이다.

김서령의 ‘참외는 참 외롭다’ 가 바로 그랬다.


아침 열 시에 영풍문고에서 약속이 있었다. 조금 일찍 도착했기에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신간을 모아 놓은 곳에서 그 책이 눈에 쏙 들어왔다. 제목 탓이었을까? 미색 표지에 풀꽃의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던 것일까? 무심하게 아무 곳이나 펼쳐서 몇 문장을 읽었다. 가슴이 뛰었다. 책을 곱게 제자리에 내려놓고 지하 스타벅스에 앉아서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가슴이 콩콩 뛰었다. 돌아갈 때 살 책이 생겼다는 사실과, 그 책의 몇 문장이 내 마음을 얼마나 흔들어놓았는지 마주 앉은 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몇몇 순간에도 잠깐씩 아득해졌다.



책을 사들고 돌아온 날부터 아주 천천히 읽었다. 어제 열 쪽을 읽었으면 오늘 다시 다섯 쪽 앞으로 돌아가서 읽었다. 그래도 여전히 신선했고 놀라웠다. 마치 마법 같았다.

십 수년간 신문에 칼럼을 썼고 그동안 출간한 책도 여러 권인 저자는 내년이면 예순이 되지만 아직 자신 안에 들끓는 이야기를 풀어내지 못해서 억울하고, 그래서 이제 그 이야기를 풀어내기 전에 그동안 쓴 잡문! 들을 모아 엮는 것으로 이전의 자신과 결별하는 의식을 치른다고 했다.


귀신 나오는 집을 지나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불혹이 되그든 담배를 피우고 천명을 알그든 높은 산에 올라가라’고 했던 황 씨의 기억을 품고, 수밀도 같은 뺨을 지닌 딸아이와 연신내 시장 빛 안 드는 구석의 좌판에서 천이백 원짜리 국수를 후루룩 빨아들이면서 창비시선을 읽는 여자, 전철역 입구에 세운 트럭에서 산 참외를 한 입 와사삭 베어 물고 눈물이 핑 도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지 스스로에게 일깨워줘야 할 때는 사과 한 알을 껍질째 깨물어먹는 이가 쓴 이야기다. 내가 좋아하는 분꽃을 보려고 그녀는 별이 뜬 밤에 밖으로 나간 이야기를 한다. ‘쓸쓸하지 않게, 두려움도 외로움도 없이, 그러나 미래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없이’ 빈 사무실에 앉아 있던 11월의 끝날을 이야기한다. 콩과 목련과 엄마가 남긴 작은 접시, 양조장과 성냥공장과 국수집을 징검다리 건너듯 콩콩 건너뛰며 놓여 있는 문장이 읽는 이의 가슴을 흔들어댄다.


DSC06399.JPG
DSC06378.JPG

그이 덕에 이 가을이 바쁘게 생겼다. 책 여러 권을 다시 읽고 싶어졌고 새로운 도서목록도 생겼다. 가보고 싶은 곳도, 해보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생겼다. 책 몇 권을 찾아 잘 보이는 곳에 꽂아놓았다. 야채 코너에 가면 감자랑 사과만 보이고 생선 코너에 가면 가자미만 보인다.



당분간 내 책상과 부엌과 침대 옆에는 ‘백석’과 ‘윤택수’와 ‘김승옥’이 놓일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곳에 ‘참외는 참 외롭다’ 가 함께 있는 풍경.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