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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Feb 25. 2016

이것도 책이야? - 무용지용 병맛 심리 상담소

라이모

                                                                                                                                              '안녕하세요'가 세상에 선을 보였을 무렵에 온라인 서점의 신간과 베스트셀러 순위를 종종 볼 기회가 많았는데 그때 상위권에 있던 도서들은 바로 색칠공부였다. 어렸을 때 색칠공부를 좋아해서 공주나 왕자가 나오는 색칠공부를 여러 권 가지고 있었지만 끝까지 완성해 본 경험은 없는 것으로 기억한다. 색을 입히기 전 흰색 도화지에 검은색으로 그려진 밑그림은 예뻤지만 당시의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근사하고 멋진 색을 골라 옷을 입히고 성을 지으면 아, 그건 내가 원하던 세계가 아니었다. 색칠하기 전의 상태가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아름다운 색칠공부였다는데 내 색채감각의 아이러니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색칠공부는 어디까지나 놀잇감이었지 책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자리를 잡다니!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 중에는 그 책이 왜 베스트인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책들도 종종 있었으므로 색칠공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서 새삼 이상할 것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음이 분명했다( 방금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은 나로서는 나의 책이 그동안 내가 코웃음 쳤던 베스트에 오르기를 원했었음에 틀림없다. 민망하고 부끄러워 숨기고 싶지만 사실입니다!). 어쨌든 컬러링북들은 여전히 서점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으니 이제는 색칠공부도 스스로 완성해가는 하나의 책으로 인정해야 할까?




놀이북이라고 했다. 컬러링북 같은 것인가 보다 짐작했다. 단순하고 투박한 선, 흑백의 모노톤으로 전개되는 만화도 아니고 그림책도 아닌, 순서도 없고 친절하지 않아서 예의도 없었던 책이 처음에는 낯설었다. '병맛'이 무슨 뜻인가 했더니 '맥락이 없고 형편이 없으며 어이없음을 뜻하는 신조어'라고 한다. 제목은 맞게 지었군. 한 장씩 넘기다가 이게 뭐야 하던 생각은 슬슬 물러나고 나도 한 번 해볼까 하는 호기심이 전면에 나섰다. 색연필을 들어 줄도 긋고 동그라미도 그리고 색칠도 하다가 말풍선을 채워볼까 했지만 이미 너무 깊은 곳으로 숨어버린 날것 그대로의 단어와 감각을 다시 불러내기가 만만치 않아서 그만 포기하고 책을 아이에게 넘겼다. 
"해 볼래?"
"이게 뭐야?"



그리고 다음날. 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이의 지난날을  이 책에서 만났다.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을 때 사인을 하라고 했더니 강아지를 그려놓아서 당황했던 일, 한동안 만화가가 되겠다고 엄청나게 그림을 그려댔던 일, 교과서보다 만화책을 소중히 여겨서 빌려달라고 해도 매몰차게 거절했던 일(이건 책을 험하게 다루는 엄마의 탓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종일 놀고 나서도 언제든지 아, 이제 좀 놀아야겠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아이의 지난 시절이 책장을 넘길 때마다 조금씩 되살아나왔다. 



우린 둘 다 한동안 스도쿠에 빠져서는 스도쿠 문제집을 몇 권씩 사가지고 잠도 안 자고 숫자놀음을 하기도 했었다. 한 번은 더 이상 풀 스도쿠가 없어서 아이에게 몇 장만  달라했더니 이 녀석이 아까워서 벌벌 떨면서 겨우 두어 장 떼어주던 기억.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정성 들여 풀어놓았다.



만화가가 되고 싶었던 아이의 화려한 지난날이 엿보이는 부분.
검은색 상체만 그려져 있고 하체는 아이가 그려 넣은 것.
이 페이지를 보고는 처음에는 놀랐고 두 번째는 좀 마음이 아렸다. 만화 좋다고 할 때 구박 좀 덜 할걸.



말 안 듣는 것도 여전해서 검은색으로 칠하라고 했음에도 
기어이 파란색을 섞어놓는 반골 기질.



꼼꼼한 성격에 자를 대고 그었음이 분명한 선, 선, 선,
이건 불꽃놀이 같구나.
이 책을 내게 다시 내밀면서 방학 동안에 그림 한 장 제대로 못 그렸네 하고 웃던 녀석은 지금 외가에 가있다. 개강 전에 외할머니 뵙고 온다고 하더니 내일은 포켓몬스터 전시회에 가신다고(그녀는 대학원 2학년입니다). 교과서보다 만화책을 몇 배나 더 소중하게 여겼던 아이는 요즘 그동안 애지중지했던 자신의 컬렉션을 팔아서 친구랑 영화도 보고 밥도 먹는다.



읽는 책은 아니고 노는 책이라고 하더니 놀이 후에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그림과 글씨로 소중하고 멋있어진 책. 놀이가 끝나면 모래성은 허물어지고 장난감 집은 상자 속으로 들어가지만 이 책은 남았다. 
책 속에 아이의 그림과 글이 들어있으니 이제 이 책은 절대로 내버릴 수도 빌려줄 수도 더욱이 팔 수도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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