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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29. 2016

2016.4.29 - 베이킹 테라피 2

금요일은 좋다. 식구들 모두 부담 없는 이틀을 앞에 두고 있는 까닭이려니 하다가 흠칫한다. 그렇다면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날들은 부담스러운 거구나 하는 생각이 떠올라서다. 무슨 일이든 꼭 해야 하는 건가 싶다. 별일 없이 느긋하게 보내는 날들도 더러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몇십 년을 살려면 중간중간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라고 말하고 싶은 날.



아침에 식구들 내보내고 커피 만들려고 냉장고를 열었다가 아래 칸에서 뒹구는 오렌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에 오렌지 케이크를 구워볼까?     



앞뒤 생각 없이 오렌지를 잘라서 팬에 넣고 끓이기부터 했다. 재료를 챙기다 보니 아몬드 가루도 조금 모자라고 바닐라 빈도 없다. 더더욱 큰 문제는 전동 거품기가 사라졌다는 사실인데 스테인리스 거품기로 아무리 저어봐야 이제는 예전처럼 빡빡하고 농밀한 거품을 만드는 건 역부족이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난감했다. 모처럼 할 일도 없고 날씨도 좋은 날, 느긋하게 책이나 읽을 양이지 무엇하러 케이크는 굽는다고 이렇게 수선일까 중얼거리며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믹서에 계란과 설탕을 넣고 돌려보기까지 했지만 그렇게 해서 거품을 올릴 수는 없는 일. 팔이 얼얼하도록 거품기를 돌려도 헛수고였지만 너무 애쓸 거 없다는 생각에 적당한 선에서 멈춘 후 밀가루와 아몬드 가루, 녹인 버터를 넣고 휘저어 반죽을 만들었다.



팬에 설탕과 함께 끓여 만든 오렌지 토핑 위에 반죽을 붓고 170도에서 45분 굽고 꼬챙이로 찔러보아 묻어나는 것이 없으면 완성이다. 반죽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모양과 향기는 갖추었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건 오렌지를 자르고 거품기로 계란을 휘젓고 팬을 오븐에 놓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파도치는 것처럼 요동쳤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는 것. 역시 무언가에 몰두하는 건 흐트러진 마음을 바로잡는데 최고의 처방이다. 베이킹 테라피 두 번째는 오렌지 케이크로구나.



한결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케이크를 잘라서 바람 솔솔 부는 그늘로 나갔다.      



나를 위한 오렌지 케이크와 라일락 가지,

나를 위한 초록색 리넨과 이파리,

나를 위한 햇볕과 바람.

이만하면 충분하다.   



주말을 앞둔 오후의 마당이 고즈넉해서 좋다.

무스카리가 한창인 주방 앞 주목 아래 그늘의 서늘함을 기억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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