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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y 11. 2016

오월 풍경

오후 3시의 기록들



5월 1일

달력 한 장 넘어갔는데 계절이 바뀌었다.
밖에 나가서 풀을 뽑다가 바람 부는 그늘에 앉아 쉬었다.

깜박하고 잠이 들었는데 발 쪽이 따뜻해서 일어나니 맨발에 오월의 태양이 이글이글! 올해는 손보다 발이 먼저 그을렸다.


오월의 첫날
모란이 피기 시작한 날
소나무 가지를 쳐내고 마당에 하늘을 들인 날
얼음을 띄운 찬 우동을 먹는 날
좋은 날.                                                                                                                                                                                            


5월 3일

제법 많은 비가 내렸다. 우산으로 비도 막고 바람도 가리면서 종일 돌아다니다가 추워서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집에 오는 버스에  올라탔다. 오월이지만 벽난로에 장작을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타닥이며 나무가 타들어 가는 소리에 마음이 놓인다. 서서히 퍼져가는 온기에 몸도 풀린다. 할로겐 불빛에서도  따스함을 덜어내고 싶은 주방에서는 냄비에 닭볶음탕이 끓고 있다.

아, 나는 뭐 먹지?        



5월 4일

예고도 없이 여름 끝의 태풍보다 더 무서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비를 몰고 왔고 비는 바람을 놓아주지 않아 밤새 함께 난리를 쳤다. 아침에 밝은 해를 만나니 이건 뭐 세찬 풍랑을 헤치고 뭍에 다다른 느낌이다. 장미와 으아리 가지들이 부러졌고 라일락이 다 떨어졌다. 시들어가던 블루베리 꽃도 누가 털어낸 듯이 깔끔하게 옷을 벗어버렸다.



라일락은 떨어져서 한 번 더 꽃을 피운 듯하고 모란은 쏟아지는 비를 아랑곳하지 않고 만개하였다.



나도 꽃을 피우고 싶어서 초밥을 만들었다.

초절임을 한 죽순을 섞고 벚꽃 절임을 얹어냈다.

요란하게 비가 내리더니 길가에는 이팝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웠고 신록으로 성장한 나무들이 눈이 부신 것을 보니 이제는 그만 봄에게 잘 가라고 인사를 해야 할 때.                                                                                                                                    


5월 5일

하늘하늘한 봄옷이 사고 싶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유독 옷이 사고 싶어진다. 도쿄에 도착한 오늘은 기꺼이 지갑을 열어주리라 마음먹었지만 역시 옷을 사는 건 어렵다. 생각한 건 분명 옷이었으나 숙소에 들어와 보니 차 한 통, 모기약, 휴족시간, 양말 세 개가 든 봉지 하나, 멋 부리는 건 역시 나와 어울리지 않는구나.



5월 6일

지갑 구경을 한다. 카드 넣는 곳이 없다. 저 작은 지갑에 만원 짜리 몇 장만 넣고 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싶다.  커피 볶는 냄새에 홀려 원두 조금 사고 야채 가게 구경하다가 색 고운 토마토랑 당근 한두 개씩 사고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나 수다 좀 떨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단골 빵집에서 갓 구워 나온 식빵 한 봉지 사서 집에 가고 싶다. 가끔은 예쁜 옷이 걸린 양품점 앞에서 지갑 속의 돈을 헤아리다가 그냥 뒤돌아 서기도 하겠지만 동전 몇 개가 딸랑거리는 작은 지갑 하나로 매일 살아갈 수 있는 생활이라면 나라는 사람도 어쩌면 자신 있게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5월 7일

백화점 일층에는 손수건, 모자, 우산 등 패션 소품들을 파는 매장이 있다. 화장품도 팔고 액세서리도 파는 아기자기하고 화사한 매장들 사이에 양말 매장이 있다. 여름인데도 털실로 짠 양말이 '시원한 양말'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선을 보인다. 도대체 발에 붙어있을까 싶게 얕은 양말, 발이 훤히 드러나는 투명 양말, 레이스가 나풀거려 부끄러운 양말, 리본과 구슬이 달린 양말, 수가 놓인 양말, 공정무역 제품이라는 양말, 신을 수 없을지라도 갖고 싶은 가지가지 양말 끝에 '발 모양 양말'에까지 다다랐다. 발과 발목이 우리들의 발 모양 그대로인 솔직한 양말 앞에 서서 보통의 양말들이 발 모양 그대로가 아닌 것을 그동안 모르고 살아온 것을 알았다. 발 모양 양말을 신으면 보통의 양말을 신을 때와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하기만 할 뿐 내가 정작 산 양말은 여태까지 신었던 것과 같은 보통의 양말.                                                                                                                                                                           



5월 8일

가방 안에서 빨래 주머니를 꺼내 세탁기 앞에 쏟아놓는다. 내가 없는 동안 세탁물 바구니도 가득 찼다. 색 있는 것, 없는 것, 가볍게 빨 것, 삶아야 할 것, 단독 세탁을 해야 할 것 등등 빨래 하나도 허투루 할 수가 없는 게 바로 살림이구나. 미처 하지 못한 설거지 감을 보고 밥을 먹은 걸 알고 젖은 타월이 쌓인 걸 보고는 내가 바다 건너에서 웃고 걷고 헤매고 있을 때도 식구들은 나름대로 살았구나 한다.

사는 건 이런 건가 보다.
매일 씻어야 할 그릇이 생기는 것,
매일 빨아야 할 수건이며 양말이 나오는 것,
바닥에 떨어진 물방울을 닦아 내고
휴지통을 비우고
빈 스킨 병을 헛되이 흔들어 보는 것,
여름 원피스들을 꺼내다가 입을만한 블라우스 한 장을 발견하는 기쁨,
주방 밖에서 흔들리는 초록 이파리들이 만들어 내는 현기증,
이런 게 사는 건가 보다.                                                                                                                                                                                             


5월 9일

하늘은 적당히 우윳빛으로 흐렸다. 모자 하나로 오월의 뙤약볕을 가리기에는 역부족이라 흐린 날이 반갑기까지 했다. 오늘은 마음먹고 마당의 풀을 뽑기로 했다. 풀 뽑다 보니 시든 튤립들이 눈에 거슬려 꽃대들을 자르고 그러다가 양귀비들이 너무 촘촘히 서있는 게 마음이 쓰여 솎아냈다. 화분에 뿌린 당근, 파슬리, 순무, 빨간 무도 솎아내고 토마토 순도 땄다. 쪽파 두어 뿌리 뽑아서 싱크대에 갔다 두고 다시 풀 뽑기.



점심 후에 얼음 띄운 커피 만들어 다시 마당으로 나왔으나 오늘은 풀을 뽑는 날이라고 일찌감치 정한 탓인지 눈에 글자는 안 들어오고 삐죽삐죽 풀만 보인다. 바람이 콩알만큼 불 때마다 향기가 퍼진다. 주인공은 은방울꽃이다. 내일 비가 내린다니 오늘부터 내가 독점해도 괜찮겠지. 한 다발 묶어 물 잔에 담아두고 아처가 메이에게 보낸 은방울꽃다발의 모양도 저랬을까 궁금해한다.                                                                                                  



5월 10일

내 앞에 누가 있어서 그를 따라가기만 하면 좋겠다. 중간에 옆으로 새거나 주저앉으면 소리쳐 불러주고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는 사람이 있어도 좋겠다. 순간순간 이렇게 할까 저리로 갈까 망설이지 않아도 스르륵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냥 그대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도 괜찮다고 해주면 좋겠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나아갈 필요 같은 것은 없다고, 지금 그대로 머물러 한동안 지내도 문제 될 건 없다고 누가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얘기해주면 좋겠다. 가끔 잘 지내고 있냐고만 물어봐주면 좋겠다.                    



5월 11일

은방울꽃이 여전히 싱그러운 아침.
모란이 꽃잎을 뚝뚝 떨구었으니 내 봄은 이제 다 갔지만 울울창창한 푸른 숲이 바로 집 옆이니 모란 대신 밤나무 푸른 잎과 층층나무 하얀 꽃으로 여름을 준비한다.



고운님에게서 받은 여름 인사.
글자 몇 자 적어 보내기도 어려운 세상인데
책과 사진에서 보신 풍경을 손으로 수를 놓아 이리 보내주셨으니
나는 이 여름을 행복하게 보내야 할 의무가 생겼다.



무지개 물고기가 생각나는 보라 고래 한 마리.
건강하고 시원한 여름을 보내라는 말씀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층층나무 꽃이 하얗게 핀 마당에서 저녁을 먹었어요.
올해 마당에 차린 첫 번째 식탁입니다.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아서 그랬다는 건 핑계고요.
집안에서 삼겹살을 굽는 걸 피하느라고요.
저는 고기 열심히 구워주고 나중에 김치 구워서 많이 먹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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