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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y 15. 2016

2016.5.14 - 순무의 하루

                                                                                                                                                                                                                                                                      


씨앗이 절로 떨어져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매발톱꽃이 핀다. 꽃은 같은 꽃인데 해마다 색과 모양이 달라진다. 해가 바뀌면 아이가 자라고 집은 낡아지고 나 또한 나이가 들지만 저 작은 꽃만큼 해마다 조금씩 예뻐지기를 기대하는 탓에 작년과 다른 색의 매발톱꽃을 볼 때마다 스스로의 모습을 거울에 비추어보듯 잠시 숨을 멈춘다. 



봄에 씨앗을 뿌리면 싹이 날 때까지의 침묵은 다디달다. 씨앗만큼 작은 싹이 움트고 고물고물 본잎이 나오면 얼마나 기특한지 새로 사귄 친구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 놓치지 않고 싶은 마음에 온몸의 감각을 깨웠던 지난날의 어느 때처럼 눈과 귀를 모은다. 며칠 전에 빨간 무 한 포기가 쓰러져 있길래 살폈더니 그만 뿌리가 녹아버린 걸 발견한 이후로 나갈 때마다 야채를 심은 화단 쪽에 신경이 쓰인다. 식구들이 아직 잠자리에 있는 이른 아침 흙 위로 하얀 몸통을 내민 순무 하나를 당겼다. 포슬한 흙이 묻은 채 동그란 순무 하나가 부드럽게 땅에서 빠져나왔다. 



행여 더 자랄 여지가 있는 것을 조급한 마음에 뽑는 건 아닌지 그리하여 며칠만 더 기다리면 얻을 수 있는 보름달처럼 탐스러운 순무를 앙증맞고 귀여우나 미숙한 순무와 바꾸는 게 아닌지 순무 두 뿌리 뽑는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을 스쳐간 찰나의 생각들은 또 얼마나 희고 푸르러서 싱그러웠던가. 흐르는 물에 씻어서 껍질을 벗겨 베어 물고는 그만 눈을 감았다. 아직 어린 순무의 부드러운 속살은 온화하고 정다웠으며 달콤한 즙이 순식간에 입안을 가득 채웠다. 초가을에 밭둑에서 뽑은 어린 무의 아삭한 매운맛에 절로 돋아난 소름의 크기만큼이나 햇살을 머금어 따뜻하고 살짝 데친 듯 말랑하고 순하게 응축된 단맛이 눈물겹도록 애틋했다고 하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냉장고에서 굳어진 밥을 쌀알이 다 풀어지도록 뭉근하게 끓였다. 붉은 매실 한 알과 김가루를 얹어 점심이라 내놓고 산길을 돌아 사온 신선한 원두로 커피를 만들었다. 작고 하얀 순무로 시작해서인가 순하고 평화로운 오후가 지나간다.



블루베리가 커지는 오월 중순. 
주말의 오후 3시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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