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Jun 05. 2016

계절 소풍

양은숙

새롭게 만나는 책의 첫 장을 열 때는 대개 무덤덤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을 구했을 때는 즐거운 기대로 가슴이 조금 일렁이는 정도다. 책장을 넘겨가며 아, 이 책이 나랑 맞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보통이다. 블로그에서 항상 살갑게 대해주시는 살구반지님의 책이어서였을까. 그녀의 두 번째 책, '계절소풍'의 첫 장을 넘길 때는 평소와 달리 왜 그렇게 조마조마하던지.                                           


사실 나는 그녀에게 진 빚이 많다. 아파트에 살다가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를 와서 3, 4년쯤 지난 시절이었을 것이다. 예전의 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집안일이 많아진 데다가 슬슬 새 집에 적응을 하면서 자신이 어쩐지 늪에 고인 물 같다는 느낌이 들어 힘겨워하고 있던 어느 날, 서점에서 '들살림 월령가'를 만났다. 도시에서 살다가 시골로 이사를 갔다고 했다. 글은 속도감이 있었고 생생했다. 그녀가 들려주는 음식이야기는 경쾌하고 자유로웠다. 여전히 요리책을 보면서 끙끙거리고 있던 시절이었는데(아,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쩐지 족쇄가 풀리는 느낌이었달까. 요리책의 틀에 너무 얽매어 있었구나, 그래서 내가 이렇게 답답했던 거구나 싶었다. 매일 만지는 살림들과 매일 되풀이하는 자잘한 일들 속에서 서서히 지쳐가고 있다가 시원한 소나기를 만난 느낌이었다. 흉내를 내다보니 조금씩 틀이 깨지기 시작했다. 식재료를 만지고 다듬는 일들이 조금씩 쉬워졌고 그때 처음으로 요리를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물론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루콜라를 사면 항상 모자랐다.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넉넉하게 루콜라가 생겼다. 길을 오느라고 생기를 잃어버린 루콜라를 찬물에 담가 빳빳하게 해 놨는데 '계절 소풍'에 루콜라 샐러드와 루콜라 페스토가 있는 게 아닌가. 오늘 아침은 호밀빵을 곁들인 루콜라 샐러드와 루콜라 페스토에 버무린 푸실리로 차렸다. 초록색으로 아침을 시작했더니 점심은 푸른 완두콩을 띄운 된장국, 저녁은 초록색 상추와 곰취, 깻잎 쌈이었다. 그야말로 초록색의 일요일. 그리고 내년에 우리도 루콜라를 심겠다고 결정한 날.

              


저자의 말 그대로 친절한 과정 컷이 있는 요리책은 아니다. 그래서 재료와 사진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미리 한 번 만들어 본다. 그러다가 말을 건네기도 한다. 재료가 한두 가지 빠지거나 과정이 복잡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생략하거나 바꿔보기도 할 거다. 책장을 넘기면서 마음이 바빴다. 원추리를 집 밖으로 내쫓았는데 내년에는 원추리 키가 자라는 걸 보려면 자주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송홧가루 날리는 날 툴툴대지 말고 미리 받아서 송화밀수도 만들어보자. 올봄에 그냥 뽑아버린 제비꽃은 얼마나 아까우며 여전히 쑥을 분간하지 못하는 나는 얼마나 바보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옥잠화 꽃이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정말 기특하게도 생강나무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 정도다.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살림을 일이라고 여기면 일이 되고 놀이라고 여기면 놀이처럼 즐겁다고. '계절소풍'의 저자 양은숙 님은 살림을 '소풍'이라 한다. 그녀가 나보다 한 수 위다.                            



매거진의 이전글 순수의 시대 - 은방울꽃의 계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