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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l 18. 2016

명화가 내게 묻다

최혜진

                                                                                                                                                                                                                                                                                                       

그날 나는 크림색 투피스를 입었다. 전형적인 초가을의 하늘처럼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남편에게 나는 오늘 미술관에 갈 거라고, 인형 전시회에 가는데 어쩌면 한 개쯤 사 올지도 모르겠다고 했던 것도 기억난다. 코리아나 호텔 옆이었으니 아마도 조선일보 미술관이었을 것이다. 닥종이 인형 작가, 김영희의 전시였다. 전시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 전시된 인형들에 눈길도 주기 전에 정면에 걸린 대형 캔버스 앞으로 빨려 들어가듯 다가갔다. 온갖 색들이 거기 있었다.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색들이 나란히 혹은 엉켜서 커다란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뚜렷한 형태도 없었지만 그 속에서는 불길이 타오르는 것도 같았고 바람이 부는 것도 같았으며 파도가 일렁이는 느낌도 들었다. 한참을 얼어붙은 듯이 서 있다가 작품명을 찾아보았다. '축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제목을 보는 순간 눈물이 솟았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더 울었던 것 같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스텝이 다가와서 나를 바라보았다. 난 작품을 구입할 수 있을까 물었고 그는 잠시만 기다리라고 했었다. 물론 그 작품을 살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한동안 그 작품이 내 일상의 에너지가 되었다. 외로운 날, 화가 난 날, 우울한 날, 기쁜 날에도 그 작품을 떠올리면서 중얼거리곤 했다. 오늘은 파란색 날인가 봐, 오늘은 보라색이군 하면서 오늘은 이래도 내 하루하루가 모여서 어느 날엔가 커다란 축제의 한 장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제법 했었다. 젊었던 날의 기억이다.


영화 '디 아워스'에서의 버지니아 울프


'명화가 내게 묻다'는 오래전의 나처럼 그림 앞에 서서 놀라고 마음 아파하고 공감하면서 세상을 보는 시선의 깊이를 더하고 그 지평을 넓혀간 이야기다. 잡지 에디터로 일하다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3년 정도 살았다는 저자가 유럽의 미술관에서 만난 지난 세기의 명화들을 내세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곳에 사는 자기 자신의 이야기이고 또 우리들의 이야기이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겨 그림을 보고 글을 읽으면서 저자가 그림을 대하는 방식이 내가 글을 대하는 방식과 많이 닮았다는 걸 느꼈다. 책을 읽는 내내 곳곳에서 자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림 속의 장면들에서 자신의 꿈과 지나간 추억을 읽어내고 여전히 불안해하며 끊임없이 욕심을 부리는, 포기하지 않는, 냉정하면서도 부러지기 쉬운, 겁이 많아서 자주 숨고 싶은, 잘 써진 누군가의 글을 읽을 때면 종종 몸이 굳어지는, 그렇지만 당찬 한 여자와 함께 글을 읽고 그림을 보며 수다를 떠는 시간.


영화 '디 아워스'에서의 버지니아 울프


익히 알고 있는 그림도 있고 처음 보는 그림도 많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림을 찬찬히 보다 보면 그림 속 주인공이 걸어 나와서 자기 이야기를 들려줄 것도 같다. 글은 밀도가 높지만 책은 술술 잘 읽힌다. 그녀가 던지는 질문에 답하려고 한다면 제법 시간이 걸리겠다. 나로 말하자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한번 더 속속들이 자신을 파헤쳐 보고 싶다는 생각, 그리고 몇몇 읽고 싶은 책들의 목록, 꿈결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림들은 이 책이 주는 덤이다. 더불어 오랜만에 미술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흐의 그림을 보러 용산에 간 게 벌써 재작년이다. 어느 청명한 가을날에 미술관 나들이를 꿈꿔본다. 크림색 투피스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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