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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n 21. 2017

국물 한 숟가락의 위로

유월 마당

                                                                                                                                                                                                                                                

아침은 벌들의 붕붕거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마당으로 나가는 문을 열면 부지런한 벌들은 찔레꽃 안에 들어가 앉아 있다. 검은색 털로 뒤덮인 뚱보 벌들은 덩치가 꽃보다 더 크다. 소리도 요란하다. 찔레꽃외의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내가 다가가도 날아가지도 않고 또 공격하지도 않는다. 벌에게 쏘여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행여 찔릴세라 조심조심 데크의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이번에는 조금 작은 벌들이 꽃 양귀비를 탐하고 있다. 꽃 한 송이에 벌들이 두세 마리씩 들어가 있다. 가만히 살펴보면 날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하다. 부지런한 새들이 벌레를 잡고 부지런한 벌들은 꿀을 모으나 보다.


찔레꽃


내 키보다 높은 분홍 찔레 덤불은 사실 얻어온 것이다. 이사 온 해의 가을에 자주 드나들던 야생화 꽃집에서 한 번 키워보라며 화분에 담긴 식물을 내밀었는데 그게 분홍 찔레꽃이라고 했다. 찔레꽃이라고 하면 어렸을 때 시골에서 본 찔레꽃의 하얀색과 은은한 향기밖에 알지 못한 나로서는 분홍색 찔레라는 단어가 얼마나 달콤하게 들리던지 냉큼 받았다. 키는 20 센티미터 정도가 될까말까한 아주 작은 아이였다. 얼마나 자랄까 싶어서 데크에서 마당으로 내려가는 계단 귀퉁이에 심었는데 8 년 만에 이렇게 자란 것이다. 작년에 너무 무성해서 키를 과감히 줄였는데 그게 오히려 성장을 촉진한 결과가 된 듯하다. 지금은 거대한 분홍 찔레 덤불이 되었다. 꽃은 지금 한창이고 향기는 하얀 찔레꽃에 비해 약하다. 찔레꽃이 피는 계절에는 아침마다 꽃 앞에서 놀란다. 하루에도 수십 번을 지나다니면서 아주 잠깐씩이지만 이 집에서 살게 된 게 몇 년이나 지났는지 되짚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나이 들어 집과 마당을 돌보기가 버거워지면 아파트로 다시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남편에게 혼자 가라고 쏘아붙인 게 바로 오늘이다. 작지만 이 마당이라도 없었으면 어찌 살았을까!



블랙커런트는 작년에 심은 것이다. 헌인릉 화훼 단지에 있는 한 농원에 사과나무를 사러 갔다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것을 보고 혹해서 데려왔지만 정작 집에 오니 빈혈을 앓고 있는 여자처럼 힘이 없어서 보기가 민망했다. 어찌 겨울을 날까 걱정했으나 정작 날씨가 까다롭던 올봄, 가장 먼저 풍성하게 싹을 내었다. 마당의 식물들 중 구슬 같은 열매를 다는 것은 은방울꽃, 둥굴레, 그리고 블랙커런트다. 은방울꽃은 주황색 방울 같고 둥굴레는 초록빛을 띤 어두운 남빛이다. 남양진주보다 검고 반짝이는 열매의 블랙커런트는 먹을 수 있지만 은방울꽃과 둥굴레는 그 소용을 알지 못하는 데다가 한여름에 들어서면 잎이 노랗게 변하면서 말라서 겨울이 오기 전에 잘려버리기가 일쑤다. 결국 제대로 살아남아 쓰임을 다하는 것은 블랙커런트다. 요 며칠 검은 열매를 볼 때마다 그만 거두어야겠구나 마음만 먹다가 오늘 아침에 냄비를 들고 자리를 잡았다. 우리 집에서 잼 만드는 건 남편의 일이다. 나보다 열 배쯤 참을성이 많고 또 그 열 배쯤은 꼼꼼하고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라 잼 만들기를 재미있어한다. 다른 과일보다 쉽고 빠르게 만들어진 잼이지만 맛은 최고다. 설탕은 과일 양의 절반이 채 안되게 넣었다. 작년에 만든 냉동 블랙커런트 잼보다 맛이 월등하다. 



아침, 저녁으로 양귀비가 있는 구역을 찬찬히 살핀다. 씨방만 있고 꽃봉오리가 없는 개체를 가려 뽑는 중이다. 이른 아침 하늘거리는 꽃밭은 아름답지만 오후의 꽃밭은 내겐 너무 진하고 농염하다. 일생에 두어 번 양귀비 밭을 만나면 물론 황홀할 것이다. 다만 그게 매일이라면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블루베리도 색이 변하면서 알이 굵어지고 있다. 작년에 블루베리를 따먹으러 왔던 새들은 아직 보이지 않지만 매일 밥을 먹으러 오는 지빠귀들과 목욕하러 오는 까치가 언제 블루베리를 탐할지 모를 일이다. 바질은 아직 풍성하게 자라지도 않았는데 성급한 녀석은 꽃대를 물기 시작한다. 바질페스토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포기해야 하는 걸까? 오늘 아침에는 토마토 앞에 앉아서 이파리를 건드리면서 향기에 취하고 있었더니 바람이가 다가와 코를 들이댄다. 방울토마토를 좋아하는 녀석이라 냄새도 익숙한가 보다. 강아지와 새와 경쟁하는 사람이라니!



날은 더웠지만 따뜻한 국이 간절했다. 뜨끈한 국 한 숟가락이면 뭉쳤던 근육이 풀어질 것도 같고 허전했던 마음도 채워질 것 같았다. 언젠가 읽었던 수필중에서 건더기가 많은 국을 끓이는 이야기가 생각나서 흉내를 냈다. 시장에 안 간지 여러 날이라 마땅한 국거리가 없었다. 며칠 전 뽑아서 넣어둔 샐러드용 빨간 무와 순무 몇 줄기가 전부였다. 양파도 파도 두부도 똑떨어진 부엌이지만 다시마와 멸치를 넣어 맛국물을 우렸다. 끓는 육수에 순무와 빨간 무를 숭덩숭덩 썰어 넣으니 초록은 더 진해지고 빨강은 한결 선명해진다. 무가 살캉하게 익었을 즈음에 된장을 풀고 한소끔 더 끓였다. 내일은 장바구니를 가득 채워 돌아와야겠다.


미리 만들어둔 밑반찬밖에 없다 해도, 아니 그조차 없다 해도 
건더기 가득한 된장국 한 사발만 있다면 헤쳐 나갈 수 있다. 
그러니까 부엌에 들어가고 싶지 않을 때도, 
왠지 기운이 없을 때도, 
나는 의지하는 기분으로 건더기를 가득 넣어 된장국을 끓인다.

                                                      히라마쓰 요코 . 바쁜 날에도 배는 고프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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