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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ug 17. 2017

왜 여행하세요?

보고 싶어서, 가고 싶어서


대학교 1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돈이 생겼다. 10만 원이었다. 무슨 무슨 장학금이라고 했다. 그런 큰 돈은 처음 가져보는 것이었다. 동생을 불러 종각역 지하상가에 갔다. 빨간색 털실로 짠 스웨터를 하나 사주고 남은 돈으로 나를 위한 기차표를 샀다. 학교 다닐 때 들고 다녔던 가방에 옷과 세면도구를 챙겨 넣었다. 어디를 갈 것이며 어느 곳에서 잠을 잘지 계획도 없었으니 염려도 불안도 없었다. 엄마는 내가 방학 동안 외삼촌 집에서 학교 도서관에 다닐 것으로 알았을 것이며 외삼촌 내외는 방학이니 당연히 집에 가는 것으로 알았을 터였다. 당돌한 열아홉 살이었다.


오사카, 기타하마


기억은 믿을 게 못된다고 하지만 남아있는 기억마저 모두 조각난 것뿐이라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어떻게 갔는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디서 잤는지 세세한 것들은 흐릿하다. 비록 모래알처럼 작고 흩어졌지만  유리가 햇볕을 받아 빛나듯  그 기억들을 소환하는 날에는 알갱이마다 색과 깊이가 다른 반짝임으로 눈이 부시다.


도쿄, 신주쿠


진주에는 왜 갔을까 싶다.  남강의 바람은 겨울치고는 순하고 부드러웠지만 가슴속까지 들어와 휘몰아쳤고 발은 시렸다. 청바지와 갈색 반코트 차림은 아마 여행 내내 같았을 것이었지만 기억 속 그 옷의 배경은 언제나 같은 곳, 광한루였다. 부산을 갔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기차를 종일 탔던 날도 있었다. 기차가 한 역에서 움직이지 않고 몇 시간 동안 서있는 바람에 안동역에 내렸을 때는 한밤중이었던 것, 옆자리에 앉았던 여자와 잠 잘 곳을  찾아보기로 하고 밤거리를 걷던 일, 새벽녘 잠결에 씻고 화장하고 옷을 챙겨 입고 조용하게 나가던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 등 모든 기억들은 퍼즐 조각처럼 맥락도 설명도 없이 내 몸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도산서원에 가는 길이 너무 푸르고 아름다워 춤추듯 걸었던 일, 강릉 해변의 소나무 숲과 겨울 바다에서 낚시하던 사람들, 어느 역 앞의 중국집에서 손님은 나 혼자였다.  어느 역에선가는 맞은편에서 오는 기차가 도착해야 내가 탄 기차가 떠날 수 있었는데 그때 바로 맞은편 기차의 창가에 지난밤 방을 함께 썼던 여자가 기대앉아 있는 모습이 보여서 반가웠던 일. 출장을 간다더니 어느새 일을 끝내고 돌아가는구나 생각했던 일. 할 일이 있어서 계획대로 일을 마치고  돌아간다는 건  참 멋진 일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잠 잘 곳을 찾다가 도통 찾을 수가 없어서 길 가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당신 집으로 데리고 가서 먹이고 재워주셨던 고마움.


도쿄, 아오야마


마지막 날, 역에서 남은 돈을 헤아리다가 땅콩 한 봉지를 샀다. 비닐봉지를 뜯어서 땅콩을 주머니 속에 쏟아붓고 밤 기차에 앉았다. 서울로 돌아가는 마지막 밤이니 호젓하게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며 책을 읽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땅콩을 씹으면서 말이다. 책은 꺼내지도 못했고 땅콩들은 주머니 속에서 껍질만 벗겨지고 말았는데 그 이유는 우연히 마주 앉은 남자가 밤새도록 말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 대학 학보 기자라고 했다. 학교 이름을 물어 알려주니 몹시도 부러워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다니던 학교의 기자들은 전용 취재차량을 타고 취재를 다닌다는 게  그 이유였다. 두 명씩 마주 앉았던 네 명은 처음에는 모두 일행이 없이 혼자였는데 어쩌다 네 명의 시끄러운 무리가 되어 밤새 그 객차 안의 잠들을 방해하고 말았다. 청량리역에 내리니 날은 밝았지만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도시가 얼마나 거대해 보이던지. 주머니 속에는 동전 몇 개만 짤랑거렸다.


교토, 니시키 시장 근처


혼자 떠난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런 마음을 먹었는지 겁도 없었구나 싶지만 그 기억들을 떠올릴 때마다 어렴풋이 미소가 지어지는 건 나도 어쩔 수 없다. 젊음은  무모하고 또 용감해서 추억은 그다지도 순결한 것일까? 삼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때의 일주일 남짓한 내 멋대로 식의 여행이 그립고 그때의 내가 부럽다.


도쿄, 아오야마


어림잡아 한 달에 한 번 며칠씩 집을 비운다.  출장 간다고 집을 나설 때마다 식구들에게 미안하면서도 홀가분하다. 무한 반복되는 집안일에서 며칠이나마 손을 놓을 수 있어서 떠날 때는 홀가분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집 생각이 난다. 내가 내게 주고 싶었던 시간들을 누리자고 단단히 마음먹어도 소용없다. 사방에서 끝없이 일상의 유혹이 넘쳐난다. 예쁜 그릇, 편리한 도구, 낯선 야채와 과일들, 무수히 많은 종류의 오일과 드레싱과 시럽들, 구름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속옷과 타월과 양말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면 그렇게 벗어나고 싶었던 살림하는 여자라는 타이틀 속으로 돌아갈 때가 다가왔음을 안다. 다행스럽게도 내게는 돌아갈 집이 있다!


여행은 지긋지긋했던 집을 사무치게 그리운 곳으로 변모시키는 힘이 있다.

도쿄, 오모테산도(?)


어디라도 갔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일상에서 지쳤다는 마음이다. 하기 싫으면 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내버려 두는 게 한때 나의 살림 처방이었다. 살림이 하기 싫으면 살림을 외면한다. 주방의 냄비와 팬들을 버려두기다.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가능하면 멀리 떠날 것. 떠나온 곳을 뒤돌아 보지 말고 돌아갈 곳을 염려하지도 말 것. 이루지 못한 것들을 아쉬워 말고 해야 할 일들을 피하지도 말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온전히 누릴 것. 그러다가 그리워지면 돌아갈 것. 살림에게로, 집으로, 내 자리로, 나에게로.



가벼운 여행기 한 권을 읽었다. 저자는 여행지에서 사진을 찍고 게스트하우스의 벽과 거리 풍경과 아이들의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는 건 사람들에게 대화를 건네는 저자만의 방법이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여행지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이렇게 많은 따뜻한 기억들을 가지지 못했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그가 나는 신기했다. 관계에 지치고 배려에 질려서 떠나버리고 싶은 나와는 달리 그는 여행지에서도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손을 내밀어 껴안는다. 낯선 곳에서 한층 자유로워지는 이유는 자신에게로 시선을 모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온 나와는 달리 그의 촉수는 언제나 타인을 향하고 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나는 이들은 함께 모여서 여행 이야기를 나눈다. 작은 나무 탁자에 쪼그리고 앉아서 비행기 티켓을 예매한다. 그들은 여행 중이지만 여전히 여행을 꿈꾸며,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면 여행을 하듯이 살아갈 거라고 이야기한다. 여행지에서의 작고 사소한 것들에 만족하고 고마워하면서 팍팍한 일상을 견뎌내겠다는 그들의 말과 내가 집 밖에서 집안의 작고 사소한 일들이 자아내는 기쁨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결국 같은 마음의 다른 표현임을 책을 거듭 되풀이해 읽으면서  알았다. 작은 사진, 짧은 문장 속에 숨은 젊음과 두려움과 용기를 하나씩 집어내어 나란히 늘어놓으니 그건 삶에 대한 경건하고도 따스한 시선이었다. 내 마음 같아서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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