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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Nov 12. 2017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그림책 처방을 받아볼까요

                                                                                                                                                                                                                                                                                                                                                                                                                                                                                                                                                                                                                                                                                

 몇 년마다 책 정리를 한다. '이 책은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아'와 '언젠가 꼭 다시 읽을 거야'로 나뉜 책 무더기들을 앞에 두고 뒤적이고 골라내는 며칠간은 '정리'라는 노동 중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친구와의 정담처럼 보드랍고 온화하여 애틋하기 그지없다. 가차 없이 혹은 망설이는 손끝으로 골라낸 책들을 상자에 담아 어딘가로 보내는 일은 한 시기와 이별하는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골라낸 책들을 보내고 난 후의 책장 모습이 정리하기 전과 비교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교적 최근에 구입한 책들은 가뿐하게 정리 박스로 들어갈 수 있어도 오래된 책들이, 정리를 시작하기 전에는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던 책들이. 세로 조판이라 읽기도 불편하고 책장이 누렇게 바래고 낡아서 바스러질 것처럼 보이는 책들이 오히려 살아남는다. 책장 정리를 하고 나면 책방이 산뜻하게 반짝거릴 것 같지만 오히려 오래되어 보이는 이유다. 아무래도 나를 구성하고 있는 체세포들 중에는 오래된 책들에게서 옮겨온 조직들이 심어져있나 보다.



 그렇게 책 정리를 거치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책 중의 일부는 그림책이다. 보통 그림책은 그 책의 주인이 자라면서 작아진 신발이나 고장 난 장난감들과 함께 치워지기 마련이지만 나의 책장에 남겨진 그림책들의 주인은 그 책들을 살 때 이미 어른이었다. 아이를 핑계로 내가 사들인 책들인 것이다. 책장마다 그림이 있고 글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들을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 그림책들의 여백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작아도 확실한 소리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오래전부터 나는 이미 가졌었나 보다. 지나온 날들과 다가올 날들을 두 손에 모아 쥐고 빨래를 털듯이 탁탁 털어 반듯하게 접어두고 싶은 날에 곁에 두고 싶은 그림책들의 목록이 늘어났다.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덕분이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혹은 걱정거리가 없는 날이 단 하루라도 있을까? 나를 불편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있는 그대로, 한계가 있는 채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면' 숨쉬기가 지금보다는 한결 쉬워질 것이라는 처방을 '점'이라는 그림책을 통해 보여주는 작가의 통찰력은 아무래도 세상과 자신을 왜곡 없이 자세히 들여다보고 천천히 음미하는 평소의 자세에서 길러진 자질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리하여 어느 날 이 책의 저자 또한 머뭇거리며 자신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을' 거라고 짐작한다. 

이름을 쓰는 일.
이름을 쓴다는 건 '이게 나예요'라고 선언하는 일입니다. 
있는 그대로, 한계가 있는 채로 자신을 인정하는 일이죠.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파스칼 메르시어나 사노 요코처럼 흠모해 마지않는 작가들의 문장을 그림책이 가진 여백에 원래 있었던 것처럼 끼워 넣는 절묘함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곁에 두고 싶은 그림책의 리스트를 늘려나가는 것은 덤이고, 그림책과  한 몸처럼 맞추어진 책과 작가들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걸 따라가다 보면 
 내가 가진 증상에 맞는 처방전들이 책 속 곳곳에 포진되어 있다는 걸 절로 알게 된다.



 브런치에 '전업주부입니다만'을 연재하기 시작한 지 4주가 지났다. 일주일에 한 개씩 쓰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울까 생각했던 준비기간이 지나자 바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자신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며 어떻게든 되겠지 했던 낙관은 무모함의 다른 이름이었음을 지금은 안다. 막막함과 절박함으로 구멍이 숭숭 난 외투를 몸에 말고 낯선 거리에 서 있는 기분으로 글을 쓴다. 금요일 아침이면 글을 예약하라는 알림이 온다. 토요일을 한두 시간 남겨두고 글을 올리고 나면 머리카락까지 젖어 있다. 다시 시작하는 한 주가 바로 앞에 있는 기분이란! 어쩌자고 열여덟 개나 되는 목차를 구성했을까, 아니 애초에 연재를 하겠다고 덥석 받아들였을까, 내가 혹시 미친 건 아니었을까 별별 생각을 하다가 맞닥뜨린 구절에 마음을 내려놓는다.


잘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너무 커져서 한 발짝도 못 뗄 것 같은 날이 계속되면 어떻게 하냐고요?  후진 글이라도 일단 쓰고 보자는 생각으로 책상 앞에 앉는 수밖에요. 계속 점만 반복해 그리면서 저 나름의 실험을 하는 베티의 심정으로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자고 마음을 먹는 수밖에요. 창작의 부담감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악의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니까요. 아무것도 쓰지 않으면 타인에게 평가받을 필요도 없고 타인의 지적에 상처받을 일도 없지만 나의 글이라는 것도 역시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
시작할 수 없으면 아예 못 쓰고 만다.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기.



각자의 문제가 무엇이든 이 단단한 책에서 자신에게 맞는 처방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부드러운 어조가 가진 단호함이 저자가  쓴 또 하나의 책, '명화가 내게 묻다'에서보다 우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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