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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y 10. 2018

걸어도 걸어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십 년쯤 지난 후에 오늘을 떠올린다면 어떤 것들이 기억에 남을지 모르겠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포카치아를 우유를 섞은 계란 물에 담가 버터에 구워낸 아침식사, 시댁에 보낸 멸치볶음과 장조림과 복숭아 병조림, 레고 스토어에서 본 타지마할 모형의 가격과 품절이란 사실, 70% 세일하는 코너에서 산 자석 책갈피, 마당에서 뽑은 야채들과 냉장고에서 찾아낸 토마토로 만든 샐러드, 내일도 미세먼지로 파란 하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염려, 아직 결정하지 못한 아이의 생일선물. 물건과 사실과 느낌들로 이루어진 하루가 어지러운 책상 위에 쌓이는 청구서와 읽지 못한 책들 사이에  차곡차곡 쌓인다. 


씨앗 뿌린 지 이십 일 만에 수확한 샐러드용 채소들로 만든 초간단 샐러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소설은 낮은 목소리로 읽히는 이야기다.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목욕물을 데우고 노래를 부르면서 지난 기억들을 들춘다. 어렸을 때 쓴 작문과 새로 나온 자동차와 마당의 백일홍 나무를 이야기하면서 무정함과 비난과 회한과 깊은 슬픔을 드러낸다.  형의 죽음은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그의 부재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사는 게 어쩜 이렇게 잔인할까 싶을 만큼 일상은 되풀이되고 하늘은 맑고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닌다. 아름다운 것들이  슬픈 것은 이제  잊지 않겠다고, 우물쭈물거리지 않겠다고, 잃은 시간만큼 더 사랑하겠다고 한 다짐마저 너무 쉽게 잊고 말 것을 알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은 언제나 너무 늦어버린 때, 되돌릴 수도 없어서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지는 때다. 설사 되돌아간다고 해도 잘 해낼 자신이 없으니 그저 묵묵히 오늘을 살 뿐.



      

그때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든가 
지금이라면 좀 더 이렇게 했을 텐데라든가......
이제 와서 그런 감상에 젖을 때가 종종 있다.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고 시간과 함께 가라앉아서, 
오히려 흐름을 가로막는다.
잃어버릴 것이 많았던 하루하루 속에서 한 가지 얻은 것이 있다면, 
인생이란 언제나 한발 늦는다는 깨달음이다.
체념과도 비슷한 교훈일지도 모른다.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와 '바닷마을 다이어리'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와 책은 보통의 일상을 칼로 도려내듯이 매끈하게 잘라낸 것처럼 느껴진다.  제각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모여 보통의 날들을 엮어간다. '태풍이 지나가고'나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원형이 이 얇고 작은 책, '걸어도 걸어도'에서 다시 빛난다. 오늘 나의 무미했던 하루도 역시 소중한 날이었음을 알게 해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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