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문숙 May 23. 2018

런던을 걷는 게 좋아

버지니아 울프는 말했다

길을 잘 못 찾는다. 두어 번 가 본 곳이라도 처음 가는 것처럼 헤매기 일쑤다. 그럼에도 걷기를 좋아한다. 오래전부터 버스로 두어 정거장 거리는 부러 걸어 다닐 때도 많았다. 요즘도 걷는 걸 겁내는 편은 아니라 을지로의 우리은행 본점 앞에서 버스를 내려 북촌 깊숙이 자리한 책모임 장소까지 걷는 길은 한 달에 한 번 혼자 즐기는 소풍이다. 영풍문고 사거리에서 나는 언제나 시간을 확인한다. 길을 건너 계단을 내려가서 영풍문고를 가로질러 종로서적을 통과해서 조계사길로 나갈 것인지, 아니면 그대로 종각을 지나쳐 안국역 쪽으로 곧장 갈 것인지 결정해야 하므로. 고백하자면 시간은 언제나 모자란다. 





일찍 나온다고 해도 느긋하게 서점 두 곳을 지나 조계사 주변의 종이와 부채와 한복을 파는 가게들을 두리번거리다 보면 시간은 언제나 예상보다 빨리 흘러 인사동 입구를 거쳐 안국역 사거리에서 길을 건널 즈음이면 발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식빵만 파는 것 같은 빵집, 두 사람만 들어가도 움직이기가 어려울 것 같은 좁은 가게, 너무 일찍 반팔 차림인 게 마음에 걸려 자꾸만 바라보게 되는 외국인 관광객, 한복이라 봐주기에 민망한 옷차림의 어린 여자들의 웃음소리, 닫힌 문 너머가 궁금한 한옥들, 안경집으로 바뀐 목욕탕, 식당과 반찬가게와 사진관을 지나면서 걷는 속도는 다시 느려지고 나의 두리번거리기도 계속된다. 꽤 여러 번을 걸었으니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걷는 동안 내게로 다가오는 풍경들은 여전히 낯설고 놀라워 나는 매일 지각생이다.





[런던을 걷는 게 좋아]는 버지니아 울프가 1931년 12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굿하우스키핑 Good Housekeeping]에 격월로 연재한 여섯 편의 에세이를 모아 만든 작은 책이다. 어디에 살든 런던을 그리워하고 사랑했으며 걷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그녀가 남긴 런던 산책기다. '침묵과 고독과 위험을 건너온 배'들이 모여드는 부두를 시작으로 그녀의 소설에 무수히 등장했던 옥스퍼드 거리를 지나 디킨스 Charles Dickens나 칼라일 Thomas Carlyle, 키츠 John Keats의 집에서 그들의 흔적을 따라 부유한다. 수도원과 대성당, 하원의사당을 거쳐 그녀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소개하는 곳은 이름 없는 노부인의 응접실이다. 언제 어디에서 사는지가 어떻게 사는지를 결정한다고 말하다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마찬가지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과 바로 내일 죽을 것처럼 사는 게 결국 같은 의미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걸 다르게 말하고 다른 걸 같다고 하는 그녀의 문장에 읽을 때마다 매혹되고 압도된다. 내가 매일 헤매는 것도, 매 순간 망설이는 것도, 겁내다가 그예 지쳐 나가떨어지는 것도 다 괜찮다고 바로 옆에서 속삭여주는 것처럼 마음이 차분해진다.





1924년 5월 26일, 월요일.
런던은 매력적인 곳이다. 말하자면 황갈색 마법의 양탄자를 타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름다움의 한가운데로 운반돼 가는 것 같다. 밤은 놀라울 정도여서, 하얀 주랑 현관과 넓고 조용한 거리 모두 아름답다. 그리고 사람들은 토끼처럼 가볍고 즐겁게 들락거린다. 나는 사우샘프턴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거리는 바다표범의 등처럼 젖어있거나, 햇빛 때문에 빨갛거나, 아니면 노란색이다. 나는 버스들이 오가는 것을 보고, 미친 듯이 손잡이를 돌려대는 낡은 풍금 소리를 듣는다. 언젠가 런던에 대해 쓰리라. 이 도시가 개인의 생활을 집어 들어, 힘들이지 않고 그것을 가져가 버리는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밝아진다. 로드멜에 있을 때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 어느 작가의 일기





글을 읽을수록 외로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떤 책은 다가가기가 불편하고 중심에 이를수록 나를 아프게 한다. 글의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시기를 지나고도 한참 후에야 글이 나를 밀어낸 게 아니라 내 맘대로 읽고 싶었던 걸 알게 됐다. 내가 모자란 걸 알게 되니 세상의 거의 모든 글들이 예전보다 친절해지고 다정해졌다. 그만큼 이 책은 이렇고 저책은 저렇다고 단정 지을 수 없음은 당연한 결말이 되었다. 내가 가닿을 수 없는 글들에 자연스럽게 물들고 싶으면 내가 먼저 깊어지고 넓어져야 한다는 것을 덩달아 알게 되었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오후의 차를 마시는 시간과 저녁식사 시간 사이에 런던을 정처 없이 걷고 싶어서 정말로 연필을 하나 사야만 한다고 핑계를 대고 거리로 나갈 때(거리 출몰하기, 런던 모험. 1926,12) 나는 파 한 줌, 상추 몇 장을 핑계로 마당에 나간다. 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들이마시고 선뜻한 저녁 공기로 불앞에서 달아오른 얼굴을 식힌다. 





슬리퍼에 발을 꿰고 천천히 걸어 계단을 내려가 잔디밭을 건넌다. 잔디 사이로 삐죽 솟아난 잡풀들은 왜 그렇게 잘 보이는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나는 허리를 굽혀 풀을 뽑는다. 옆에 또 있다. 지난 어버이날에 엄마에게 얻어온 오이 모종이 자리를 잘 잡았는지 살핀다. 블루베리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는데도 아직 물이 오르지 않은 가지들을 잘라야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느릴 수밖에 없다. 파 한 줌 뽑아 들어가겠다는 생각이었으므로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이거나 끄지 않은 건 물론이다. 후닥닥 들어가면 때로는 안심, 그보다 많이 낭패를 본다. 그럼에도 이렇게 도망을 가고 숨어드는 시간이 없으면 나 또한 견뎌내지 못하리라.







내가 누군지 모르겠고 나를 아는 얼마 안 되는 이들도 모두 나를 잊은 것처럼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가끔은 누구라도 내 생각을 해줄 거라고 상상하면서 버티던 날들이 지나갔다. 정신 차려보니 이제 나는 중년의 주부가 되어 있다. 작은 목소리로 수줍게 내놓은 책 두 권을 고이 품고 나를 찾고 불러주는 이들이 생겼다. 낯설고 놀랍고 기쁘고 불안하다. 작은 엽서 한 장 보내려도 나는 때로 진땀이 나는데 고운 편지를 길게 쓰고 음악을 골라 음반을 만들고 음반 재킷까지 만들어 보내다니. 내게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곰곰이 생각한다. 그렇다. 내가 더 잘 살면 되겠지. 원망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고 예쁘게 보려 애쓰는 일. 내가 그거 하난 잘 하니까.




마음을 보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걸어도 걸어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