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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Feb 10. 2018

남편의 명절증후군


작년 대보름을 며칠 앞두고 백화점 지하에서 먹음직스러운 나물들이 푸짐하게 쌓여 있는 곳을 마주쳤다. 금방 볶고 쪄서 무쳤는지 김이 모락모락 났다. 나물들이 그렇게 수북이 쌓인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어서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나물을 담는 손길이 바쁠 만큼 손님들도 많았다. 장을 보다 말고 서서 구경하는 내가 우스웠던지 나물 파는 아주머니가 보름 나물이라고 했다. 아하! 맞다.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서 남편에게 보름 나물이라고 알려줬다. 남편은 여전히 명절 즈음에 전과 나물을 파는 곳을 지날 때마다 약간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지만 전을 부치고 보름나물을 준비하는 시간과 수고가 어느 정도인지 아는 나로서는 즐겁고 유쾌하기만 한 광경이었다. 





어렸을 때는 섣달 그믐날에 만두를 빚고 떡국 끓일 떡을 썰었다. 떡을 써는 이는 손가락에 물집이 잡혔고 만두를 빚는 사람들은 온몸을 비비 틀었다. 부엌에서는 만두를 쪄내는 솥에 물이 설설 끓고 있었는데 쟁반 가득 담긴 만두를 솥에 얹으려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섣달그믐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는 말을 들었기에 어린아이들은 눈을 비비면서 깨어 있으려고 애를 썼다. 찜솥에서는 하얗게 김이 올랐고 종일 전을 부쳐낸 덕에 기름 냄새가 가득한 부엌은 따뜻하고 풍요로웠다. 어린  눈으로 기억한 명절 풍경은 포근하고 넉넉했으나 그 뒤에 고단함이 숨어있다는 걸 안 건 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였다. 





12월에 결혼을 했으니 바로 새해를 맞이하고 설날을 앞두었다. 차례는 지내지 않고 만두를 넣은 떡국만 끓이면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믐날 오후에 만두소를 준비해서 시가에 갔다. 다른 음식들은 미리 만들어 두었으니 간단히 데우기만 하면 될 일이고 만두만 만들면 모든 준비가 끝나는 셈이었다. 이른 저녁상을 치우고 시어머니, 시누이와 함께 만두 재료를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서 만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모두 서툴렀다. 시어머니께서 며느리를 얻으니 만두를 다 만들어보는구나 하셨다. 명절이면 가족이 함께 모여서 만두를 빚고 전을 부치는 보통의 풍경을 기대했던 건 실수였다. 그해 설날의 떡국에 든 만두는 거의 다 터져버렸다. 집집마다 명절 풍경이 다를 수 있음을 알았다.




남들처럼 들썩이는 명절이 아니라서 울적했다. 즐거울 것이란 기대가 허물어진 뒤 명절은 단순히 일이 많은 날일 뿐이었다. 시아버님 제사를 모시게 되었을 때 차례도 지내기 시작했다.  홀로 감당하기에는 어려운 일 때문에 심술이 났다. 명절이나 제사가 다가와 남편이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지면 그 또한 편치 않아서 명절은 이중의 고역이었다. 명절을 앞두고 서로 긴장이 높아져가다가 별 것 아닌 일로 마음이 상한 때도 많았다. 오래전부터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애를 쓰는 날이 명절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했지만 쉽지 않았다. 




설날이 머지않았으니 여기저기서 명절 관련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이다. 차례상을 장만하려면 돈이 얼마나 필요하며 부모님이 제일 받고 싶은 선물은 무엇인지, 고향에 오고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단축하려면 언제 길을 떠나야 좋을지, 명절 연휴 기간에 여행을 가려면 얼마나 서둘러야 하는지, 가짜 깁스가 불티나게 팔린다든지 하는 이야기로 TV 뉴스나 온라인 게시판들이 도배가 될 것이다. 남은 명절 음식 처리법, 명절 기간 동안 살찌지 않는 방법, 명절증후군 예방법과 치유법, 명절 직후 이혼소송이 많아진다는 이야기들이 뒤를 이을 것이고.




나는 고향에 가느라 몇 시간씩 차에 갇혀있지도 않고 몰려드는 손님들을 접대하느라 앉을 새도 없이 종종거리지 않지만 일이 많지 않다고 해서 명절의 무게가 덜어지는 건 아니다. 흙이 묻은 쪽파를 다듬고 불린 녹두를 갈아 빈대떡 반죽을 만들거나 두부를 짜고 양파를 다져서 완자를 만들면서 뒤늦게 간장이나 설탕이 부족해서 앞치마 바람으로 슈퍼에 다녀오느라 수선을 피우는 틈틈이 뉴스를 보고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 집 차례비용이 뉴스에 언급된 것과 왜 다른지,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한다. 





명절이 다가오면 잘못한 것도 없이 마음을 졸이는 남편을 바라본다. 내 명절이 다른 이들의 명절과 왜 다른지에 마음을 쓰는 대신 다른 이야기들, 다른 방식, 다른 관점들을 존중하려 애쓴다. 가짜 깁스가 필요한 여자들이 남 같지 않고, 아픈 내색도 할 수 없는 여자들은 더더욱 안타깝다. 명절 연휴에 해외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모습을 거듭해서 보여주는  TV 모니터 앞에서 빈대떡을 부치느라 저녁이면 다리가 부어오른 아내의 안색을 살피는 남편들은 아마도 아내와 엄마의 명절증후군을 염려할 것이다. 남편들의 명절증후군은 그렇게 온다. 명절이 다가오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명절증후군이란 단어에 온 나라가 점령된 것 같아 걱정스럽다. 내 고단함을 몰라 주는 것만큼이나 근거 없는 지레짐작도 피곤하긴 마찬가지다.






주말이 지나면 설날 준비를 시작할 것이다. 두어 번 장을 볼 것이고 이틀 전부터 음식을 만들 것이다. 다른 일들은 모두 제쳐 두기에 혼자라도 쉬엄쉬엄 하는 명절 준비는 어렵지 않다. 오히려 시간이 남아 낮잠도 자고 책도 제법 읽을 수 있는 명절 주간이 될 것이다. 더 이상 명절은 즐거워야 한다고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오지 않는 친지들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외로움은 홀가분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덕분에 하고 싶은 만큼 마음을 담아 내 식대로 지내는 명절을 갖게 되었다. 마음이, 정성이 삶을 지탱한다행복해지는 건 쉽다. 기대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조금만 기대하거나. 



미용실과 방앗간이 기억 속 내 명절의 배경이다. 명절이 가까우면 엄마는 미용실에 갔다, 비좁은 미용실은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렸고 수시로 터지는 아줌마들의 웃음소리에 귀가 얼얼했었다. 평소와 달리 머리를 부풀려 높이 올린 엄마의 머리가 신기했다. 미용실을 나온 엄마는 그토록 오래 공들인 머리에 수건을 얹고 방앗간에서 뽑은 가래떡이 담긴 양푼을 이고 집으로 갔다.  엄마 머리가 망가질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엄마를 뛰듯이 따라가곤 했다. 자극적인 약품 냄새로 머리가 지끈거렸던 미용실과 떡을 쪄내느라  하얀 김이 서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앉았던 방앗간 나들이의 기억을 안고 내일은 나도 미용실에 갈 예정이다. 사정없이 솟아난 새치들을 감추기 위해서다. 역시 명절은 몸단장으로 시작해야 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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