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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Feb 17. 2018

전업주부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를 기억하기

설날 차례 준비를 거의 마친 전날 밤, 늦었지만 책상 앞에 앉았다. 차례상을 위해 살 식재료와 물건들, 전날 만들어둬야 할 음식들, 설날 아침에 해야 할 일을 차례대로 적은 메모지들 사이에서 수첩을 들어 펼쳤다. 제대로 일기를 쓰지 못하는 날에는 단어 몇 개 혹은 문장 하나라도 써넣는 공책이지만 이번 주는 모두 공백이었다. 명절이라 해도 남들처럼 일이 많지 않고 분주하지 않으니 느긋하게 지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떠벌인 것이 무색했다. 명절 준비 말고도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지만 그대로 일어나서 욕실로 들어갔다. 얼굴의 물기를 씻어내면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 밑의 피부가 늘어져있는 게 보였다. 그 밤에 램지 부인의 꿈을 꾸었다.


실내의 봄


버지니아 울프가 1927년에 발표한 소설 ‘등대로’의 램지 부인은 오십 대의 여인이다. 아이가 여덟 명이나 되고 까칠한 남편만으로도 버거운데 손님들까지 즐겨 초대하며, 하인들을 다루고 집을 손보고 정원을 가꾼다. 각기 다른 개성과 재능을 가진 아이들을 보살피고 남편의 보이지 않는 패배감을 감싸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이들을 돌보는 하루를 보내고 그녀가 느끼는 것은  '꽃잎이 하나씩 접히듯, 기진맥진하여 무너져 내리는 것, 겨우 손가락 움직일 힘밖에 없는 듯한 노곤함'이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스스로 무가치하며 거짓말들과 과장들로 인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해낸다는 느낌에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람들의 온갖 감정으로 가득 적셔진 해면'처럼 느끼며, '거울을 들여다보며 나이 쉰에 머리칼이 세고 볼이 꺼진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좀 더 잘 꾸려 올 수도 있었을 텐데' 하고 한숨을 짓기도 한다. 


램지 부인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제한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버지니아 울프가 ‘집안의 천사’라고 이름 붙인 현모양처의 전형이다. 이기심이 없고 집안의 모든 사소하고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가며 자신만의 세계나 꿈이 없이 타인의 그것들을 우선시하지만 따뜻하고 안정적인 어머니와 아내로서 매력적인 동시에 자유나 창조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는 존재다. 울프 스스로 자유롭고 창조적인 글쓰기를 위해 죽일 수밖에 없었던 ‘집안의 천사’의 역할은 2018년 이곳에서의 전업주부와 많이 다르지 않다.



벚꽃, 제비꽃이 있는 풍경


지난 계절에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몸살을 앓았다. 김지영이란 이름 앞에’ 82년생’이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아팠다. 김지영 보다 100년 먼저 태어난 버지니아 울프와 10년 넘게 늦게 태어난 내 아이가 살아가는 세상이 삶의 일정 부분에서 여전히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무너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마도 많은 셰익스피어의 누이들이 설날 아침에 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느라 윤성빈 선수가 스켈레톤에서 꿈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도 지켜볼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봄 물망초, 히야신스, 상사화, 비비추의 새 싹


차례를 마치고 거실 바닥에 앉아서 마당을 내다보았다. 목련 가지에 솜털이 보송한 눈들이 촘촘히 달렸다. 봄이다. 해마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봄이 성큼 온 듯 마음이 달뜬다.  며칠만 지나면 겨우내 마당을 덮었던 마른 이파리 아래서 작고 뾰족한 새싹들이 빼곡하게 올라올 것이다. 작지만 꽃이 피는 마당이 있으니 올해도 즐겁고 행복해서 웃을 날이 많을 것이다. 게다가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창조한 인물인 셰익스피어의 누이가 봄처녀처럼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여러분 속에, 그리고 내 속에, 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녀는 살아 있지요. 위대한 시인은 죽지 않으니까요.
그들은 계속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 속으로 걸어 들어와 육체를 갖게 될 기회를 필요로 할 뿐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천천히 오래 들여다보고 일상이 윤이 날 때까지 문질러 닦아 빛나게 할 것이다. 함께 있어서 즐겁고 안심이 되지만 혼자 있더라도 외롭지 않을 것이고, 매 순간 반짝일 수는 없지만 때때로 빛나는 순간을 만들 수 있도록 집중할 수 있다면 좋겠다.


어느 봄 은방울꽃과 매발톱꽃이 핀 마당


내세울 경력도 빛나는 기술도 두둑한 지갑도 없지만 아직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 어떤 사람이라도 될 수 있어서, 무엇보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인 내게 더 이상 실망하지 않을 수 있어서 좋다. 그 ‘열려 있음’과 ‘무한한 여백’과 ‘아직 끝나지 않았음’에 안도한다.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건 어떤 일을 하는 가에 달려있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인가에 달려있다는 걸 아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전업주부라서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전업주부인 나도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어서 기쁘다.




위클리 매거진 ‘전업주부입니다만’의 마지막 원고입니다. 매주 토요일마다 글을 쓰고 고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내면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모르는 척했던 것들을 다시금 마주했고 묻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변한 것들과 변하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고 희미한 빛을 발견하고 기뻤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어 다행이고 문장을 엮을 수 있어 행복합니다. 위클리 매거진의 연재와 동시에 진행한 수필집의 출간 준비도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매주 따뜻한 시선으로 글을 읽어주신 분들과 멋진 공간에 글을 연재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브런치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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