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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30. 2018

이야기의 힘

내사랑과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꿈을 꾸거나 혹은 안갯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발을 내밀면 허공을 밟을 것처럼 불안하고 제 자리에 있으면 땅밑이 꺼질까 봐 조바심이 났다. 깨어있는지 잠들어 있는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 밤들이 이어졌다. 매일 되풀이되는 일상이 나를 건져올려줄 것을 믿었다. 샐러드에 넣을 채소들을 자로 잰 것처럼 반듯하게 같은 크기로 가능한 한 작게 자르는데 열중했고 신중하게 계량을 했으며 혹시라도 순서가 바뀌진 않았는지 여러 번 레시피를 확인했다. 끊임없이 메모를 하고 그보다 더 자주 책을 사들여 집요하게 읽었다. 눈이 흐릿하고 뻑뻑해서 감기가 어려워질 만큼 자신을 혹사시켰다.


평소보다 공을 들인 애플파이



그러다가 제프 다이어의 여행 산문집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를 만났다. 여행 산문집의 제목인데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이라니 게다가 그들을 위한 요가라니 아마 조경란이 [소설가의 사물]에서 이 책을 언급하지 않았더라도 어딘가에서 눈길이 닿았다면 나로 하여금 그 책을 집어 들게 하고 말았을 제목이었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여름 오후의 풍경처럼 나른하고, 가벼운 듯 무거운 공기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질 것 같은, 얼음을 넣은 유리잔 표면에 생긴 물방울이 떨어지면 움찔 놀라는 정도, 그러나 주의 깊게 읽지 않으면 단어와 문장 속에서 길을 잃고 말거라는 생각은 그러니까,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제임스 설터 류의 문장을 기대했으니 잘못 짚었어도 한참 어긋났다.

테크노 음악, 마리화나, 여행이라기보다는 고행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는 일정, 갈림길에서 언제나 조금 더 나쁜 선택을 하고야 마는 기이한 재능, 약에 절어 지샌 밤들을 건너 폐허로 가는 길, 고대의 폐허인 로마에서 현재의 폐허인 디트로이트까지. 명절 연휴에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기분전환용 도서를 고른다는 것이 속속들이 폐허인 한 남자가 자기만큼이나 황량한 폐허를 찾아다니는 여행이라니. 진저리를 치면서도 중간에 책을 덮지 못했던 건 작가가 늘어놓는 이야기가 당시의 내 상태와 비슷하면서도 세련된 익살이 담긴 문장이 우아하기조차 했던 덕분이었다. 사실 직전에 읽은 [WHY]의 반작용으로 고른 책이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와 단편을 새롭게 묶은 가벼운 책이었지만 꼭지마다 연상되는 그녀의 다른 작품 덕에 [댈러웨이 부인]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직후였다. 전쟁을 겪은 후의 런던, 전쟁터에서 돌아온 병사들의 사막 같은 가슴, 살아남은 자들의 일상이 매일 더 빛이 나서 끔찍했던 버지니아 울프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새털처럼 가볍고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해지고 싶은 마음에서 골라잡은 책이 폐허를 찾아다니며 신경쇠약을 앓는 이야기라니.

진저리를 치고 넌더리를 내면서 제프 다이어를 마치니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나 역시 마리화나를 처음 피운 여자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날카롭게 벼린 도끼날처럼 아슬아슬한 머리와 가슴을 부드럽게 어루만질 무언가가 필요했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그 안에서 영화 한 편을 발견했다. 샐리 호킨스와 에단 호크, [내 사랑] 이었다.     



걷기도 힘든 여자, 아기를 낳고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여자, 숙모의 집에 얹혀살다가 생선 장수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가는 여자의 미소가 이렇게 화사해도 되는 건지.


모드는 선천적으로 기형인데다가 관절염을 앓고 있다. 몸을 똑바로 세우기도 어렵고 걸음걸이도 온전치 못하다. 오빠가 자신을 데리러 올 날을 기다리며 숙모 집에서 살고 있다. 가끔 친구가 그립고 종종 그림을 그리며 끊임없이 담배를 피운다. 재치와 유머가 있고 잘 웃는다. 그리고,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에버렛은 생선 장수다. 마을에서 동떨어져 큰 길이 지나는 곳, 벌판의 작은 집에 혼자 산다. 고아원에서 자랐고 지금도 가끔 그곳에서 식사를 한다. 성격이 급해서 짧은 문장으로 말하고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거나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종일 중노동을 하고 있으므로 집이라도 깨끗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정부를 구하고 있다. 그 역시 자신에게 부족한 게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모드는 에버렛의 집에 가정부로 들어간다. 소리 지르며 다투기도 하고 가버리란 말도 나가겠다는 말도 하지만 결국 둘은 부부로 산다. 에버렛에게 뺨을 맞고 비명을 억누르며 집안으로 들어가 물감 통을 열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벽에 꽃을 그리던 모드는 카드에 그림을 그린다. 주워온 널판지 조각, 벽, 창문이 그녀의 화폭이 된다. 고양이와 꽃, 멋을 부린 소와 말, 마차, 새를 그린다.  모드는 점점 유명해져서 신문에도 나고 TV에도 소개가 된다. 그들의 작은 집 앞은 모드의 그림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에버렛은 처음에 모드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기르는 개와 닭보다 모드를 중하게 여기지 않는 데다가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친구 앞에서 서슴없이 그녀의 뺨을 때리던 에버렛은 이제 모드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집 앞을 쓸고, 해진 옷을 기우며 감자를 깎는다. TV 인터뷰에서 자신은 장작도 패고 설거지를 하는데 아내는 그림만 그리며 자기 말은 들은 척도 안 한다고 말해서 빈축을 사기도 한다.





물론 곁에 없는 편이 더 좋았을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처음 그들이 함께 살기 시작했을 때 모드가 에버렛의 성노예라는 소문이 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수치스럽다는 말을 던지던 숙모는 죽음을 앞두고 그간 숨겨왔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숙모가 모드를 불러 과거를 이야기하는 장면은 죽음을 앞두고 리드 부인이 제인 에어를 불러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것과 닮았다. 잘못을 뉘우치거나 용서를 구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돌멩이를 내려놓으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만한 행동, 비록 그것이 진실을 알려주려는 의도였더라도 말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은 채 객관적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은 가혹하다. 오래전에 멈춰버린 이야기들이 제자리에서 나아가지 못한 그대로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종종 사람을 무너뜨린다. 제인 에어가 자신이 철저하게 혼자가 아니었음을, 자신을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었음을, 즉 자신도 사랑받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고, 모드 역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아기가 자라서 꽃나무가 예쁜 하얀 집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새로운 서사가 진행될 때 진실이 의미가 있다. 에버렛이 아이의 행방을 찾아 모드를 그곳에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새로 알게 된 진실은 모드가 뒤늦게나마 찾은 평화에 고통을 끼워 넣는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영원히.

엄마가 죽은 뒤 동생을 숙모 집에 맡기고 집을 팔아버렸던 모드의 오빠 찰스는 모드가 낳은 아기도 팔아버린다. 자기가 저버렸던 동생의 신문기사를 보고 모드를 찾아온 그가 한 말은 그림값을 에버렛에게 주지 말고 돈 관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라는 것이었다. 오래전 집을 팔고 아기를 팔았던 것처럼 찰스는 동생의 그림을 팔고 싶었다. 인생이 사고파는 것만으로 이루어졌다고 믿는 찰스다.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어렸을 때 오빠의 수학 숙제를 대신해주곤 했던 모드는 여전히 오빠보다 나은 사람이어서 그런 제의를 수락하는 대신 평소 그림값에 1달러를 더해 오빠에게 그림을 팔아버린다.




숙모에게서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우는 모드에게 당신과 엮인 후로 삶이 복잡해졌다고, 당신이 없었으면 훨씬 나았을 거라고 소리쳤던 에버렛은 모드가 산드라의 집에 있는 동안 아이가 살고 있는 집을 알아낸다. 그리고 모드를 찾아가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한다.



"당신에게서 내 아내가 보여,
처음부터 그랬어,
그러니까 날 떠나지 말아 줘."
모드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니까."




영화에서 모드의 미소는 눈부시다. 클럽에서 음악에 몸을 맡겼을 때, 유리창에 그림을 그릴 때, 덧문을 다는 에버렛의 모습을 곁눈질할 때, 그림 그리는 걸 가르쳐 줄 수 있느냐는 산드라의 질문에 그건 아무도 못 가르친다고 얘기할 때, 에버렛을 떠날 수 없다고 말할 때.

그림 그리는 거,
그건 아무도 못 가르쳐요.
그리고 싶으면 그리는 거죠.
외출을 안 해서 기억에 있는 장면을 그려요.
만들어내는 거죠.
나는 바라는 게 별로 없어요. 붓 한 자루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아요.
 창문을 좋아해요.
날아다니는 새, 꿀벌, 내 인생 전부가 이미 액자 속에 있어요.





말이 많지 않은 영화다. 그래서 말의 힘을 더 실감할 수 있다. 단어와 문장이 드문드문 이어진다. 어느 사이에 그 끊어짐 속에 긴 말들이 숨어 있음을 알게 되니 사실 영화가 끝나면 해일처럼 많은 말들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결국 날카롭고 팽팽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또 실패했다. 무슨 영화를 그렇게 공격적인 태도로 봤을까 피식 웃음이 나온다. 날이 섰으면 선 대로 지쳤으면 지친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에버렛이 모드에게 말한 것처럼 나도 '손이 많이 가고 돌보기에 힘이 드는 사람'인가 싶다. 남들과 다르다는 점에 대해 생각한다. 남들은 다 알고 잘 하는 것, 너무 당연해서 문제 삼지도 않을 것들이 나는 종종 어렵다. 그래서 혼잣말 중 자주 하는 게 '나는 왜 이럴까'다. 비슷해지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러기엔 고집이 너무 센 사람이란 걸 문득 깨닫는다. 그래서 또 한 번의 포기, 다르면 다른 대로 살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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