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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Nov 06. 2018

가을에 읽기 좋은 책 한 권

우는 법을 잊었다



    후유코의 엄마는 홀로 후유코를 낳아 길렀다. 집안의 수치라는 소리를 들으며 스스로는 강박증에 시달렸지만 후유코가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자랄 수 있도록 애썼다. 엄마는 후유코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지나친 간섭도 염려도 하지 않았는데 후유코 역시 그런 엄마를 닮아서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를 지켜보며 살았다. 엄마가 늙고 병이 들자 후유코는 치매에 걸린 엄마를 집에서 간병하기로 한다. 어린 시절, 친구 남동생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갖게 된 ‘죽음’에 대한 공포, 정확하게는 ‘엄마보다 먼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공포’, ‘엄마에게 하나뿐인 딸을 잃는 슬픔을 겪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공포’를 안고 살았던 그녀는 이제 치매에 걸려 딸을 엄마라고 부르는 엄마, 스스로 먹을 수도 씻을 수도 없는 엄마를 두고 ‘먼저 죽어서는 안 된다는 공포’와 다시 직면한다. ‘점점 늘어나는 어머니의 변화에 당황하고, 거부하다 결국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되자 후유코의 싸움은 점점 괜찮아진다. 어렸을 때 엄마가 읽어주던 그림책을 이제는 후유코가 엄마에게 읽어준다. 치매 따위는 없다는 듯이 생일 파티 같은 작은 축제들을 마련하기도 한다. 그런 의식들은 때로 ‘허망하고 쓸쓸’하지만, 때로는 ‘끄덕임 한 번, 되잡는 손의 감촉만으로도 오늘을 내일로 이어갈 수 있는 힘을’ 주기도 하니까. 병원이나 보호시설을 이용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엄마의 간병을 7년 동안 계속하게 했던 동력은 그러니까 후유코가 어릴 때부터 가졌던 ‘죽음에의 공포’가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이제 후유코는 일흔두 살이다. 내일 의사를 만나면 자신의 병명을 알게 될 것이다. 검사 결과를 듣기 전에 40년을 넘게 운영해온 ‘광장’을 직원인 미치코에게 양도하는 내용의 편지를 써서 우체통에 넣는다. ‘광장‘은 그녀가 삼십 대에 출판사를 그만두고 차린 어린이책 전용 서점이다. 후유코가 좋아해서 종종 소리 내어 읽기도 하는 [미스 럼피우스]는 이제는 어른이 된 내 아이가 어렸을 때 함께 읽고 내가 더 좋아하게 된 그림책이다.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은 기억하지만 어떻게 해야 세상을 아름답게 할 수 있을지는 몰랐던 미스 럼피우스가 루피너스 씨앗을 코트 주머니에서 한 움큼씩 꺼내 길가에 뿌리면서 걷는 모습이나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읽고 있던 책 위에 손을 얹고 침대에 누워 초점 없는 눈동자로 혼자의 세계에 빠져있는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때가 종종 있었다. 씨앗 뿌리기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이야기의 속뜻을, 씨앗이 가진 의미와 그 힘에 대해 생각한다.



 산다는 건 씨앗을 뿌리는 일이고 죽음과 나란히 걷는 일이다. 미혼모라는 이유로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는 사회에 이의를 제기하고, 태어나기 전의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다고 당당히 말하는 일, 자신이 운영하는 서점에 아이들을 위한 평화와 원전 반대 그림책을 놓아두는 행동들 하나하나가 세상을 밝히는 씨앗들인 셈이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힘,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간병하는 상황에서도 반짝이는 순간을 찾아내어 일상을 빛나게 할 수 있는 힘, 어느새 한 발짝 앞으로 다가온 생의 마지막 시기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힘, 무관심에서 비롯한 편견과 폭력으로 가득한 사회에 자신이 켜놓은 등불이 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있다는 걸 후유코는 알고 있을까?


그 남자는 갑자기 죽음을 맞았다. 
그 갑작스러운 죽음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공허함과 절망감이 
나를 어머니의 간병에 매달리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불현듯 그런 의문이 들었다.
                                                 오치아이 게이코. 우는 법을 잊었다.      p.278                           


   후유코가 사랑하는 이를 잃었을 때는 그녀가 운영하는 서점 '광장'을 확장할 무렵이어서 울 여유도 없는 때였다. 직원들에게 슬픔을 내보일 수도 없었던 그녀는 울고 싶을 때마다 '우는 건 내일'이라고, 그 내일이 밝으면 속으로 똑같은 말을 되뇌며 하루를 살아냈다. 우는 것조차 다음 날로 미루고 살았던 시기를 지나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지막 시간이 아름답고 풍요롭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를 쓰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결국 그런 시간을 통해 위로받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란 걸 절로 깨닫게 된다. 사람은 의식하든 안 하든 서로 의존하며 살 수밖에 없다는 것도.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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