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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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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Dec 30. 2018

내 마당 여행하는 법

12월 - 마당에서 버지니아 울프처럼


늦잠을 자지 않는다면 매일 해가 뜨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맑은 날 아침에 동쪽 하늘을 보면 멀리 산 능선이 분홍빛이나 주황빛으로 물들어있다. 겨울에 해는 집의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곳에서 낮게 뜬다. 창백한 표정의 겨울 해는 느릿느릿 생기를 찾아가며 벌거벗은 밤나무 가지 사이를 지나 세탁실에 머물다가 서재에 농익은 햇살을 부려놓고 사라진다. 집안에 해가 머무는 시간은 짧아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거실 풍경에 놀라는 사이 긴 꼬리만 남겨놓고 내빼기 일쑤다. 마당도 사정은 비슷하다. 정오가 조금 지나면 해는 어느새 집 뒤로 넘어가 마당은 유배지처럼 쓸쓸해진다. 주방에서 내다보이는 건너편 산 중턱의 집들은 저물녘의 해를 정면으로 받아 불을 밝힌 것처럼 노랗게 반짝인다. 여름이면 그곳에 사는 누군가는 견디기 어려운 더위가 아마  서향집이기 때문일 거라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산 너머로 해가 숨어버린 오후의 부엌은 썰렁하다. 뜨거운 물에 그릇을 헹구고 물을 끓여 김을 올려야 훈훈해진다. 식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음식을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내 부엌은 언제나 수선스럽다. 감자를 자르고 마늘을 다지는 하필 그 순간에 부끄럽고 아쉬웠던 기억들이 되살아나고 억울하고 분했던 순간들이 따라 나오면 소란한 마음이 그만 칼을 든 손에 실린다. 며칠 동안 입가에서 뱅뱅 돌던 단어와 흐릿했던 문장들이 선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대부분 부엌에 있을 때여서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못하는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메모를 하느라 냄비를 태우거나 야채를 볶던 주걱을 놓지 못해서 그토록 기다렸던 그들을 그대로 놓치고 만다. 이래저래 부엌은 열기로 가득하기 마련이라 볶은 양파처럼 후줄근해진 나는 파 한 뿌리나 깻잎 몇 장을 핑계로 마당으로 나가는 문을 열곤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연필을 사야 한다는 핑계로 겨울 오후에 거리로 뛰쳐나갔던 것처럼 말이다.


연필 한 자루에 마음이 뜨거워질 사람은 아마 없겠지요. 그런데 그거 하나 갖는 게 소원인 상황이 생기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갖겠다 결심하는 순간, 차를 마시는 시간과 저녁을 먹는 시간 사이에 런던을 유랑할 구실이 생기지요. 여우사냥꾼이 여우 숫자를 조절한답시고 사냥을 다니고, 골프 선수가 건축업자 손에서 공터를 지켜내겠다며 골프를 치듯, 문득 거리를 나서고픈 마음이 찾아올 때면 연필은 좋은 핑곗거리입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렇게 말하거든요. “연필을 꼭 사야 해.” 이 구실로 겨울 도시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에 무사히 빠져들 수 있으니까요. 런던 거리를 거니는 일 말이지요.                           버지니아 울프, WHY,P.48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는 글쓰기가 불러오는 긴장을 풀어줄 방책으로 산책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녀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히 당겨진 신경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으로 겨울 오후에 런던 거리를 걷는 것처럼 나는 주방의 소란과 분주함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에서 마당으로 향한 문을 힘주어 민다. 주부로 삼십 년 가까이 살아왔으면서도 주방과 세탁실을 오가며 긴장할 때가 많다. 여전히 살림이 어렵고 부담스러운 것이다. 매일 밥을 하고 있으면서도 살아있는 동안 아마도 이 일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거란 생각에 전율할 때가 있다. 부끄럽고 어이없는 고백이지만 사실이다. 그래서 주방을 뒤로하고 마당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고 답답한 숨통을 틔우기 위한 것인 동시에 ‘지금 이곳에 있는’ 내가 ‘나로 있고 싶은 곳’으로 건너가는 일이기도 하다.



살림을 제법 해왔으니 내가 싱크대와 쿡탑 사이를 오가면서 냄비 안에서 끓고 있는 음식을 휘젓거나 숟가락으로 간을 보고 수세미에 거품을 일으켜 접시를 닦는 것은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식구들은 내가 부엌에 있는 모습을 풍경처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든 저것이든 무언가를 하고 있는 모습은 안정감을 주기 마련이다. 내가 평소와 다른 모습일 때, 이를테면 한숨을 쉬거나 초조해하거나 넋을 놓아 멍해진 모습을 보인다면 남편이나 아이는 괜찮냐고 묻고 싶어 지거나 혹은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요구를 하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지난여름 방울토마토는 아직 익으려면 멀었고 바질 역시 먹을 만큼 충분히 자라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토마토 샐러드를 해볼까 하고 중얼거리며 마당으로 난 문을 무수히 밀어젖히곤 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이 ‘단순히 즐기는 건 좀처럼 허용되지 않기’ 마련이므로.



그렇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난 종종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럴 때는 토마토며 부추를 살피고 싶지도 않고 잔디밭 중간중간 삐죽하게 올라온 잡풀들을 뽑고 싶지도 않고 바람에 밤나무 이파리가 날려도 못 본 척하고 싶다. 눈을 감고 바람이 어디서 불어오는지 머리카락에 내려앉는 햇살이 얼마나 따스한지 소쩍새가 어느 만큼 왔는지 어제 읽은 책 속에서 발견한 단어가 내 안에서 어떻게 자라고 변화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 하지만 풀을 뽑고 시든 가지를 자른다. 생산적인 일 혹은 살림을 돌아보지 않고 말 그대로‘단순히 즐기는 것’은 질병이고 흉이고 꼴사나운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당에 나갈 때는 거의 언제나 핑곗거리라도 되는 양 바구니나 가위를 들고 있다.



저녁에 선량한 시민이 자기 집 문을 열 경우 그 사람은 분명 은행가요, 골퍼요, 남편이요, 아버지겠지요. 사막을 돌아다니는 방랑자도, 하늘을 응시하는 신비론자도, 샌프란시스코의 빈민가에 있는 난봉꾼도, 혁명을 위해 진격하는 군인도, 의심과 고독으로 울부짖는 부랑자도 아닙니다. 문을 열 때 그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빗어 넘기고 우산을 다른 우산들과 함께 받침대에 고이 넣어 두는 그런 사람이지요.                                                                                                         버지니아 울프, why, p.60


나는 종일 였다가 또는 나인 척했다가를 왕복하느라 지친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기도 하고 점심 후에 책을 들고 내 방으로 숨어들기도 한다. 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것처럼 내가 바뀐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마당이 나를 받아주고 겨울에는 책들이 나를 숨겨준다. 두어 시간 그러고 있으면 누그러져서 돌아올 때 나는 편안해져 있다. 오래된 살림과 오래된 시선과 믿음이 나를 에워싼 느낌이다. 단지 문을 열기만 하면 된다.



마당은 지금 얼어있다. 꽁꽁 얼어붙어 걸음을 뗄 때마다 발밑에서 풀이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쪽파는 널브러졌고 추울수록 생생해진다는 크리스마스 로즈도 얼었는지 초록색 잎이 투명하게 변해버렸다. 자잘한 꽃무늬가 들어간 양말, 철이 지난 분홍색 카디건을 걸친 내 모습을 내려다본다. 내 사진은 집과 마당에서 맴돌며 내 경험은 가족과 집을 넘어서지 못하고 내 인식 또한 작은 마당과 그보다 더 작은 서재를 벗어나지 못한다.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드 메스트르가 '나의 침실 여행(우리나라에서는 [내 방 여행하는 법]으로 번역 출간)'에서 보여준 통찰력과 집요함을 닮고자 한다. 우리가 여행으로부터 얻는 즐거움은 여행의 목적지보다는 여행하는 심리에 더 좌우될 수도 있다(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에서 재인용)고 했으니 겨울 오후에 런던의 거리를 배회하는 즐거움 대신 얼어붙은 내 마당을 탐험하는 즐거움에 집중할 것.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양말을 꿰신고 카디건을 걸친다. 먹을 걸 찾아 집 울타리 가까이까지 내려왔던 고라니, 수련 아래 살던 금붕어, 우산 속의 청개구리들은 잘 있겠지? 겨울이 좋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기에는 내 나이가 좀 많은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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