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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y 17. 2019

북유럽 그림이 전하는 말

                                                                                                                                                                                                                                                                                                                                                                                                                                                           

목덜미 뒤가 뜨겁다.                         


                     

                                                  

아직 아침도 먹지 않은 시각임에도 그렇다. 벌써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건조한 마당에 물을 주는 참이다. 해가 뜨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이 달아오르는 계절이라 서둘렀지만 오늘도 자외선과 열기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바라보는 마당은 한창 아름답고 그늘은 시원하지만 할 일이 있는 마당에서는 뜨거운 햇볕과 먼지를 피할 수 없다. 끊임없이 생겨나는 집안일들이 아니라면 그늘에서 무위의 몇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하루 동안 해야 할 주방 일을 아침에 끝내버리기로 했다. 모란 봉오리가 부풀고 있는 것을 보았으니 곧 송이가 열릴 터였다. 모란이 가장 아름다운 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주방 창가에 섰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너무 밝아서였을까. 창의 윗부분은 그대로 놔둔 채 얼굴과 손으로 쏟아지는 빛만 가릴 정도의 커튼을 단 창문 앞에서 한 여자가 일을 하는 중이다. 낭비가 전혀 없는 그림이다. 홀로 일하기에 알맞은 정도의 공간, 어쩐지 느릿할 것 같은 동작, 간단한 재료에 단순한 조리법의 음식일 것이 분명하다.  이 여자의 뒷모습을 나는 많이 본 것만 같다. 작가 최혜진은 [북유럽 그림이 전하는 말]에서 그녀의 노동이 억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자발적인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부엌이라는 소우주에서 자신만의 고요한 질서를 창조하고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모습이 담백하고 행복해 보인다고 썼다. 동시에 반발과 호기심도 동시에 일었노라고(p.87).     

                                      

                                                 

몇 년 전 남편과 함께 갔던 도쿄에서의 아침식사 풍경을 기억한다. 정갈하고 고요한 식당이었다. 남편은 부엌이 이렇게 정돈되고 질서가 잡혀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난 공연히 발끈해서는 이런 부엌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손이 많이 간 아침상을 받은 남편이 계속 감탄을 했다. 좋은 곳에서 정성 들인 밥상을 받아서 흡족하다는 것인데 바로 옆에 앉은 나는 그 상을 차리느라 수고했을 이들의 감추어진 분주함과 수고가 연상되어 가슴이 뻐근했다. 점잖은 풍모의 나이 지긋한 요리사가 삼단 도시락을 양손에 받쳐 들고 나와서 식탁 위에 반듯하게 내려놓아주었으나 벽 하나로 가로막힌 주방 저편에서 그는 아마도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삐딱한 상상은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었다. 난 그때 이미 이십 년도 넘게 아침상을 차려온 주부였으니까.  맑은 액체 한 모금을 넘기는 순간 느닷없이 이래도 되나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투명하고 노르스름한 액체는 토마토주스였다. 붉은색의 다소 무거운 토마토 즙이 맑고 투명한 액체로 변해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토마토와 요리사가 거쳤을 과정의 지난함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가볍게 마시고 즐기면 될 일을 토마토주스 한 모금에 마음이 먹먹해지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은 내가 밥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매일 식재료를 다듬고 음식을 만들어 식구들을 먹이는 일을 이십년 넘게 하다보면 음식만들기에만 익숙해지는 게 아니다. 만들어진 음식의 담음새와 맛 너머의 무엇이 보인다. 그게 한결 같은 기꺼움만은 아니란 걸 알아서 음식을 마주하고 울컥하는 일이 점점 잦아진다.



작가는 이어서 쓴다. 



휘게, 라곰, 소확행의 공통분모는 무엇일까? 나는 '가꾸다'란 동사가 떠오른다. 건강한 식재료로 만든 음식, 도자기 그릇 위 정갈한 담음새, 지친 몸을 기대어 누우면 안도감이 느껴지는 공간, 조바심 내지 않는 마음, 서로의 고민을 헤아리는 농밀한 대화...... 이런 일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그 안에 아름다움을 부여하겠다고 선택하고 가꾸어야 가능하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오직 나만 아는 공간, 일상의 반경과 몸의 마음, 그리고 관계를 가꾸겠다는 자세, 소박한 생의 감각을 아끼는 태도, 결국 살림하는 마음이다. 북유럽 화가들이 집안일하는 사람들의 바지런한 몸짓과 담백한 표정, 그들을 가꾼 공간의 질서 정연함을 통해 포착하고자 했던 가치는 아마도 이것 아닐까(p.92).                                             


                                                 

보이는 것이 그 안에 담긴 마음과 자세를 그대로 드러낸다면 이런 게 행복이란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감출 수 있다. 아닌 척할 수 있다. 꽃을 정리하는 여인의 뒷모습, 일을 하던 그 자리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린 여인의 모습에 내가 보지 못한 내 모습이 자꾸만 겹쳐진다.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 무엇이 나로 하여금 온전히 이곳에 있을 수 없게 할까란 내 오래된 질문에 대답하는 듯한 문장은 이 책의 뒤편에 있다!


생각이 조금씩 이곳을 떠나 저곳을 향한다. 자신에게 허락된 좁고 따분한 공간 너머, 여자로서의 역할과 본분 너머 자유가 허락된 그곳을 꿈꾼다. 울타리 바깥으로, 행실을 제약하는 온갖 목소리가 사라진 공간으로, 이중 잣대 없는 곳으로, 자기 목소리와 자기 언어로 세상에 대해 읽고 말할 수 있는 자리로, 똑같은 1인분의 무게로 견해가 존중되는 장소로, 멀리, 멀리, 떠난다.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느새 나도 함께 그 꿈의 발자국을 따라 걷는다(p.227).                       


                                             

고개를 끄덕인다. 북유럽 작가들이 남긴 그림과 그들의 발자취를 찾아 떠돈 3년 동안의 시간, 2만 4870킬로미터의 여정이라고 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고 싶은 건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의 확신을 읽고 있자니 여태 부엌과 마당을 오간 것 외에는 떠나본 적이 없는 나도 그런대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2만 몇 킬로미터는 흉내 낼 수 없겠지만 시간이라면  작가의 열 배 정도를 들였으니 지금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이 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머지않아 가늠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란이 한창이다. 곧 봄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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