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 중의 어느 날이었다. 거울 속 얼굴이 이상했다. 오른쪽 입술이 부어오른 것 같았다. 혀로 입술 안쪽을 건드려봤다. 이물감이 느껴졌다. 손으로 입술을 만져보니 거기 뭔가 있었다. 작은 혹이었다. 입술 안에서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였다. 손으로 만지다가 거울을 보기를 여러 번 되풀이했다.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얼핏 보면 잘 표시가 나지 않았다. 입술 안쪽에 생긴 혹이라 나도 여태 모르고 있었으니 남들도 모를 거라 생각했다. 표도 안 나는 혹 같은 게 뭐 대수냐 싶었다. 집이었으면, 후다닥 씻고, 재빨리 바르고, 종일 거울 한 번 보지 않기가 매일이라 아마 발견하지도 못했을 것이고 그럼 신경 쓰이는 일도 아니었을 텐데 공연히 거울 속 얼굴은 왜 들여다봐가지고 이렇게 속이 시끄러운가 짜증이 났다. 돌아온 후에는 거의 잊고 지냈다. 어쩌다가 생각이 나면 만져보곤 했다.
조금씩 커지는 것 같았다. 겁이 났다. 뭘까 궁금했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누군가 알아볼 만큼 커지거나 아프기 전에는 그대로 놔둘 셈이었다. 잠들 때마다 혹이 사라지는 꿈을 꾸고 싶었다. 혹이 조금씩 커지면서 불안도 커졌다. 마침내 세수할 때마다 걸리적거리기 시작했다. 비누거품을 낸 손으로 그 부위를 문지르면 조금씩 아픈 것도 같았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뭔가 해야겠구나 하던 차에 감기가 덜컥 찾아왔다. 혹독한 몸살감기였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며칠을 앓았다.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은 채 자고 일어난 아침에 욕실에서 손을 얼굴에 가져갔을 때 입술 안의 혹이 줄어든 걸 느꼈다. 분명했다. 혹은 매일 작아지더니 그예 사라졌다. 날카롭게 눈을 찌르던 주목의 초록 잎새와 하늘거리는 개양귀비 위에 앉았던 햇살의 눈부심, 노랗게 반짝이다가 잘 익은 샴페인처럼 달콤해지던 여름 오후의 냄새가 바라기 시작했다. 다시 찾아온 보통의 날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혹을 가졌을 때 그토록 풋풋하고 선명하고 날카롭던 여름은 이제 아련하고 모호한 열기를 가진 채 스러진다. 그처럼 생생하고 아릿했던 날들은 그리울 테지만 다시 생기는 혹은 역시 사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