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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두나무집의 봄놀이

진달래 화전

by 라문숙


마당을 채웠던 봄볕은 오후가 되면 집 뒤로 사라진다. 빛을 잃은 마당이 쓸쓸해서 조각난 햇빛이라도 남아있는 곳이 없을까 두리번거리다가 봄바람의 심술에 못이긴 듯 집안으로 쫓겨 들어온다. 머무는 동안에야 나의 봄볕이지만 사그라진 그것이 어디로 순식간에 사라지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느 구석엔가 내려앉아 그늘을 걷어내고 온기를 나눠주고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것만 해도 등이 따스해졌다.



어느 오후에 그 '구석'이 나의 침실임을 알았다. 방문을 여는 순간 수를 놓은 커튼을 뚫고 혹은 창문과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살이 침대와 책상과 잡다한 물건들 위에서 느릿하게 춤을 추고 있는 걸 발견했다. 의자에 파묻힌 내 몸 위로 무심한 듯 내려앉는 봄이여!



목련 근처에 명이나물이 자란다. 명이가 싹이 나서 한창 자랄 때는 목련이 아직 피기 전이다. 명이 장아찌를 파는 이에게서 모종 열 개를 사다 심은 것이 몇 년 전인데 해마다 조금씩 세를 불린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한데도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자라서 언제쯤 수확을 해야 할까 망설이던 차에 삐죽하니 올라온 꽃대를 발견했다. 망설임 없이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서 장아찌를 담았다.



화단 귀퉁이에 재미 삼아 심었던 진달래도 해마다 핀다. 올해 유난히 탐스러워 몇 송이 따서 화전을 부쳤다. 맛이야 있을까, 쌉싸름한 찹쌀 반죽에 꽃으로 모양을 내고 꿀을 따르는 그 일이 재미다. 명이 잎이 세기 전에 장아찌를 담고 진달래가 지기 전에 화전을 부치는 일 같은 건 쉽지 않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가 아니라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제때를 맞추려면 마음이 먼저 가서 기다려야 함을 안다. 알면서도 잘 안 되는 것, 놓쳐버린 걸 알아챌 때마다 서운하다. 화전 몇 개를 접시에 올려두고 뿌듯한 이유가 여기 있다.



어릴 때 살던 집에는 앵두나무가 있었다.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풍채가 당당했다. 엄마는 앵두꽃이 필 즈음이면 앵두나무 옆으로 평상을 옮기는 일로 봄맞이를 했다. 우리는 종종 거기에서 소꿉을 놀거나 낮잠을 잤다. 오가다가 들르던 이웃들이 잠시 쉬어가기 맞춤이었고 장바구니에서 나온 채소들을 다듬기에도 좋았다. 앵두꽃이 핀 풍경은 기억에 없지만 앵두가 빨갛게 익어 나뭇가지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건 생각난다. 앵두나무는 제 열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늘어뜨렸는데 누구라도 그 모습을 보면 앵두를 딸 마음을 먹지 않기가 어려웠다. 양재기 가득 앵두를 따는 시기가 오면 금세 여름이 오곤 했다.


지금 내 마당에도 앵두나무가 산다. 기억 속 나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나무지만 앵두나무가 있어 내 어린 시절에 해마다 색을 입히는 기분이다. 봄 한 철을 아침저녁으로 앵두나무에 말을 건넨다. 꽃그늘에서 금방이라도 엄마가 걸어 나올 것 같다. 파란 플라스틱 바가지에 앵두를 가득 따서 담고. 나무는 해마다 자라서 나는 늦봄마다 지난해보다는 더 많은 앵두를 따모으며 즐겁다. 그렇게 살면 되겠지 싶다. 작은 앵두나무가 자라는 속도로. 느리지만 확실하게.



편지를 받았다. 그녀는 대구에 산다. 불안하고 겁이 난 채로 집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던 시기를 보내고 나니 요즘에는 창밖에 핀 벚꽃이 눈에 들어온다고 한다. 일 년이면 서너 번 곱게 쓴 손편지를 보내는 그녀는 분리수거를 하러 나갈 때를 제외하곤 거의 집안에만 머물러야 하는 이 봄이 그럭저럭 괜찮다고 한다. 집안에서 택배 상자 속에 든 야채와 샐러드를 받아먹고, 기프티콘으로 생일선물을 받고,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사는 일상. 이제야 집에 머물 수 없이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이들의 수고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음이 부끄럽다는 고백이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한다. 계획했던 전시회도 미루고, 좋아하는 서점과 꽃집과 카페에도 가본 지 오래되었지만 자기는 여전히 잘 지낸다고, 걱정 마시라고, 우체통은 칠팔 분만 걸어가면 된다고, 편지를 부치고 돌아오는 길에 봄바람을 들이마시고, 꽃구경을 할 거라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읽는 봄날.


모두 안녕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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