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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트가 자라면 상그리아

4월의 맛

by 라문숙


마당은 매일 얼굴을 바꾼다. 매화향기와 목련 봉오리조형미에 감탄하다가 문득 고개를 돌리면 점점 더 뾰족해지는 무스카리와 가시 돋친 두릅, 핏빛처럼 붉은 꽃봉오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아슬아슬한 명자나무가 보인다.



다가오는 게 무엇이건 닿기만 하면 찔러버리겠다고 온몸을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적갈색 두릅은 그러나 끓는 물에 들어가는 순간 온화하고 맑은 초록색의 새순이 된다. 고양이가 발톱을 감추는 것처럼 가시를 감추고 앙큼을 떠는 봄을 지켜보는 건 그래서 조금은 민망하고 안쓰러운 일이기도 하다. 두릅을 새파랗게 데친 후 빨간색 초고추장과 함께 내는 게 어쩐지 부끄러워서 요즘은 삼간다. 대신 집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하고 깨소금과 들기름으로 무쳐서 접시에 담아놓고 보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엉거주춤 서있는 새색시 같다. 부끄러움과 불안함에 약간의 허세를 베일처럼 늘어뜨리고 서있는.



오랜만에 시장에 갔다가 사과를 사 왔다. 못생겼다고 싸게 파는 못난이 사과다. 맛과 향은 좋은데 흠집이 약간 있어 저렴하게 파는 거라고 했다. 사과 껍질을 벗기는데 향이 없다. 한 입 베어 물었으나 맛도 없다. 맛이 좋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산 내가 바보니 누굴 탓할까! 설탕과 버터를 넣고 졸여서 타르트타탱을 만들었다. 계핏가루와 럼주의 힘을 빌려 완성한 파이를 먹은 다음날, 딸기를 샀다. 역시 맛도 향도 별로였다. 딸기를 설탕과 함께 냄비에 넣고 끓일 때마다 부자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잼을 만들거나 시럽을 만들 때마다 흥겨운 이유다. 거기서 멈췄으면 좋았을 터였다. 전날 만들었던 타르트타탱을 다시 만들었다. 다만 이번에는 사과가 아닌 딸기로. 결과는 참담했다. 점수를 준다면 빵점이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이치코가 당근케이크를 생각하며 만든 양배추 케이크가 떠올라 혼자 웃었다. 그럼 그렇지. 사는 게 그렇게 매사 쉽기만 하다면야!



먼지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창고 구석에 뉘어져 있던 화이트 와인을 꺼내왔다. 코엥트로 같은 건 없어도 좋다. 사과와 오렌지와 설탕, 와인 반 병을 넣고 끓여 식힌 후에 남은 와인을 마저 붓고 라임 조각과 민트 잎을 띄워 마신다. 럼주가 있으면 한 스푼 더해도 좋다, 기쁜 일이 있을 때, 너무 심심해서 좋은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을 때, 사람들을 모아 밥을 먹을 때 내가 만드는 상그리아다.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고 함께 마시고 싶은 사람도 없지만 마시고 싶었다. 한잔 마실 때마다 허리 뒤쪽 등뼈부터 따뜻해지는 그 느낌이 좋다.



버지니아 울프는 척추의 반쯤 따라 내려간 이 곳을 영혼의 자리라고 불렀다. 포도주를 마시면 영혼의 자리에 차츰차츰 불이 밝혀진다고(자기만의 방). 그녀 자신도 이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세월]을 읽다 보면 포도주를 마시는 장면이 유난히 따스하다. 이를테면 '그녀는 포도주를 마셨다. 포도주가 그녀의 척추에 있는 어느 마디를 어루만져주는 듯했다(352)'라든가 '그가 그녀의 잔을 다시 채웠다. 그녀의 뺨이 발그레했고 눈이 빛났다. 그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 자신도 포도주 한 잔에서 얻곤 했었던, 온몸에 느껴지는 만인의 안녕이라는 감각이 부러웠다. 포도주는 좋은 것이었다 - 그것은 장벽을 무너뜨렸다(286)' 같은 부분들이 그렇다. 오후의 햇볕은 따스하고 나는 내 방에 혼자 있다. 아무것도 아닌 날이 최고의 날이 된다.



사실 이 봄에 내가 하고 싶은 건 그리 특별한 일들이 아니다. 망설임 없이 주저하지 말고 동네를 걸어 다니고 마트에 다녀오거나, 장터에서 처음 보는 나물의 조리법을 배운 후 봉지 가득 담아오고, 한 달에 한 번 나가는 북클럽을 연기하지 않는 일처럼 평소 하는 일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것도 없다.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만나자고 말해도 될지 생각하지 않고, 마스크를 쓰지 않은 걸 알아채고 놀라지 않고, 뉴스를 보지 않아도 궁금하고 염려할 일이 없는 날이 그립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외부인의 마을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보이는 꽃길, 꽃잎이 하롱하롱 날아다니는 길을 달리면서도 차를 세우고 내려서 서성이는, 고작해야 바라보고 감탄함에 그치는 일을 이렇게 어렵게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그립다. 봄이 머뭇머뭇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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