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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많은 계절

by 라문숙

침대 옆 창가에 놓아두었던 히아신스를 옮겼다. 작은 꽃들이 촘촘하게 피어나면서 향기도 점점 진해졌기 때문이다. 주방 창가에 두고 자주 들여다본다. 눈에 들어올 때마다 늦가을에 묻었던 구근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폭설 예보는 빗나갔다. 쌀가루처럼 고운 눈이 내려 쌓이더니 바람이 분다. 산 위에서부터 내려온 바람이 소나무 가지에 쌓인 눈을 휘몰아 흩뿌린다. 심술궂다. 가제보 위에 쌓인 눈들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침실 창 밖으로 백설이 분분한 산기슭을 바라보느라 오후를 다 보냈다.



마당에 남천이 자란다. 높이가 3 미터까지 자란다고 하는데 우리 집 남천의 키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친다. 대나무와 남천을 나란히 심어 즐기는 이를 알고 있다. 그 집에 갈 때마다 대나무는 남천을 닮아가고 남천은 대나무를 닮아가는 것 같아서 유심히 보고 듣는다. 외출도 만남도 멈춘 요즘, 바람이 불면 댓잎들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남천에서도 들리는 듯하여 그 속삼임을 듣느라 옆에 앉은 이의 말소리를 놓칠 때도 있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바람이 유난한 날이면 혹시 댓잎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하여 남천 앞에 서보기도 한다. 잎은 작지만 아름답고 탐스럽다. 작은 잎은 타원형인데 끝으로 갈수록 뾰족해져서 역시 댓잎을 연상시키지만 가을이면 붉게 물들어 자기주장을 할 줄도 안다. 꽃은 유월 즈음에 부추꽃처럼 작게, 희고 깨끗하게 핀다. 꽃 진 자리에 구슬처럼 둥근 열매가 달려 겨울의 절정을 준비한다. 불게 물든 남천의 열매에 내려앉은 흰 눈만큼 적요한 풍경이 있을까 싶다. 눈 내린 작은 정원이 무한히 넓어진다.



저녁 준비를 할 즈음 보일러 수리기사가 다녀갔다. 낯선 이의 방문에 공기까지 덩달아 출렁인다. 열린 문에서 들어온 찬 바람에 잠들었던 감각이 깨어나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세탁실 문을 열고 나가서 남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은 그쳤다. 어두운데도 하늘이 맑은 걸 알겠다. 별 빛이 그만큼 깨끗하다. 여름밤이었으면 오토바이들이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산은 지금처럼 집들이 들어서기 전에 산악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즐겨 찾던 곳이라고 들었다. 처음 이사 왔을 때 주말이면 헬멧과 고글을 쓴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산에서 내려오는 걸 보곤 했다. 이제 자전거 대신 산악 오토바이를 즐기는 이들이 여름밤 며칠 산을 누빈다. 겨울밤 정적이 깊으니 온갖 소리가 그립다. 문득 별들이 남천의 꽃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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