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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질서의 문제

by 라문숙

깨소금이 떨어졌다. 아니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엄마에게 얻어올 때까지 무침이나 볶음에 깨소금을 넣지 않기로 했다. 간장이나 소금도 아니고 깨소금이니 조금 아쉬워도 며칠쯤이야 했다. 그날 밤 남편이 주방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간식거리를 찾는구나 여겼다. 다음날 아침에 남편이 깨소금을 찾았다고 했다. 냉동실 구석에 두 봉지나 있다고. 앞으로 꺼내놓았단다.


"있어서 다행이네."

"작은 멸치도 있고 난 같은 것도 몇 장 있던데!"


그날 시장에서 꽈리고추를 샀다. 남편이 찾아낸 멸치와 함께 볶았다. 깨소금을 듬뿍 뿌려 마무리했다. 작은 절구에 볶은 깨를 한 줌 넣고 공이로 갈면서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없다고 생각한 깨소금과 생각도 못한 반찬거리를 찾아줬는데도 남편이 냉동실이나 냉장고 야채칸을 뒤적거리면 왜 미울까? 냉장고가 뭘 감추거나 숨겨두는 장소도 아니고 들어갈 때마다 먼저 문을 두드려 허가를 구해야 하는 나만의 방도 아닌데 말이다.


스스로 물건이 많은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집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나는 '무질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무질서가 가장 쉽게 점령하는 곳은 주방의 냉장고와 내 방의 책상이다. 집 정리는 어려운 일이므로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럽지는 않다. 그렇지만 집안을 점령한 무질서를 견딜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냉장고 속 작은 양념 병들이나 동강 난 야채들부터 시작한다. 냉장고에 보관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은 꺼내어 싱크대 선반에 넣어둔다. 당분간 먹지 않을 식재료들은 냉동실 안에 감춘다. 보이지만 않으면 무질서란 사라질 수도 있다고 믿는 나는 아직 순진한 사람일까. 일단 냉동실에 넣어두면 '나중에' 먹어치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나중에'라고 생각하는 때는 사실 오지 않거나 너무 늦는다는 것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행동을 되풀이한다. 해결방법을 모르지 않다. 쌓아두지 말고 먹으면 되는 것이다. 식재료를 남기지 말 것, 필요한 만큼만 구입할 것, 나도 안다. 그렇지만 야채 코너에서 양배추를 집어 들던 마음이 집에 오는 동안 변해버린다면? 그런 배반을 견디는 것이 나만의 몫인가?


통깨를 듬뿍 뿌린 땅콩조림


지난가을에 엄마에게서 받아 온 땅콩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김치 냉장고를 열 때마다 검은색 비닐봉지에 담긴 땅콩을 봐야 했다. 남편에게 땅콩 껍질을 벗겨달라고 했다. 끓는 물에 오 분 정도 데친 땅콩을 행구어서 물기를 뺀 후 다시 냄비에 담았다. 땅콩 4 컵에 간장 100ml, 올리고당 100ml, 맛술 30ml, 물 800ml를 넣고 국물이 없어질 때까지 졸인 후 마지막에 참기름과 통깨를 넣어 마무리했다.


"땅콩 남았는데!"


역시 남편이다. 껍질벗기기는 계속되었다. 깊은 팬에 볶았다. 와드득 씹는다. 고소하다. 그렇게 검은색 땅콩봉지에서 해방되었다. 아직 '무질서'에 점령당한 책상은 그대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에세이 <집>에서 빌려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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