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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23. 2021

북클럽이 있는 날, 신데렐라가 된다.

2021. 1. 23

  오랜만에 북클럽을 열었다. 여름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던 초가을의 모임 이후 연거푸 미루다가 해를 넘겨서야 만났다. 두 시간 삼십 분이 짧았다. 집에서 나가기 직전까지 주방에서 종종거리느라 몸에서 음식 냄새가 날지도 모른다는 염려도 잠시, 나는 숨겨뒀던 그림자와 구겨진 날개를 펴고 가능한 멀리 날아올랐다. 말들이 풍선처럼 부풀어 우리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다가 천장에 가서 붙어있거나 어딘가에 부딪혀 터지곤 한다. 함께 웃다가 누군가의 눈물을 보고 울컥한다. 고백은 깊고 끄덕이는 고개는 기쁘다. 시드니 스미스를, 메릴 스트립과 카렌 블릭센, 그리고 왕과 시인을 이야기하느라 발그레해진 얼굴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빛났다.  북클럽이 있는 날, 우린 모두 신데렐라가 된다.  


   

  빛나는 얼굴들이 돌아가야 할 곳은 그러나 우리가 머물렀던 책 속의 세계가 아니다. 윤슬이 아름다운 강변도,  눈이 내려 쌓인 공원도 아니다. 그만큼 아름다울 수는 없으나 또 하나의 세계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여우*를 생각한다. 시인과 왕의 언어로 '삶을 이야기하며 똑똑한 말들로 의미를 숙고하고 곱씹으며 야단법석을 떨던' 우리들을 바라보았을 그 여우를 생각한다. 내가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동안 그냥 사는 여우, 이제는 늙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야 하는 여우, 달릴 수 없지만 '나무 아래 누워서 그늘을 핥고 있는' 여우를. 돌아온 집에는 여느 저녁처럼 빨래 바구니가 가득 차고 야채가 시들고 있는 냉장고가 있다. 북클럽이 있는 날이라고 해서 밥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조금 좋은 사람이 된다. 그래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는 오늘의 이야기.



*메리 올리버의 시 <잘 가렴, 여우야>에 등장하는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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