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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26. 2021

순간들

2021. 1. 26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 중 몇 장을 즉석카메라에 연결해서 프린트했다. 알파벳과 숫자로 구성된 무형의 파일들이 물성을 가진 실체로 변하는 순간에 감동했다. 암호 같은 파일명으로 구분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들이 사각형 프레임 안에 단정하게 담겼다. 어느 날의 주방과 어떤 하늘, 찻잔과 꽃과 그림자와 창문들이 거기 있었다. 그렇다면 작년에 내린 눈은 어디 있을까?*


엄마 집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낮은 하늘에 비가 내리는 길, 구름과 안개가 이중의 베일을 늘어뜨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강을 넘고 개천을 끼고 달렸다. 터널을 빠져나오고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나는 깜박깜박 졸았다. 눈을 뜰 때마다 남편에게 어디냐고 물었다. 계속 달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도무지 집에 가까워지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다. 안개에 갇힌 도시를 벗어나는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 손을 뻗으면 안개 너머에 숨은 무엇이 만져질 것만 같아 더 답답하고 불안했다. 잠꼬대처럼 거기 누구 있어요? 하고 물을 뻔했던 기억.  아마 달리는 차 안에서 가위에 눌렸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을 때, 침대 위에 엎어놓았던 책**의 펼쳐진 부분을 몇 줄 읽었다.


"묘실의 하얀 대리석에 새겨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시행을 가슴에 담고 나는 다시 한 번 긴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드리아누스는 현재의 나보다 젊은 예순두 살에 타계했다. 이 작품을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깨달은 황제의 술회라는 형태로 정리한 유르스나르 자신은 여든네 살까지 살았다. 내게 남은 시간은 대체 어느 만큼일까."


"신들이 떠나고 아직 그리스도가 도래하지 않은 시대. 문득 유르스나르가 사랑한, 플로베르의 서간 속의 구절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공백의 시대를 살았던 황제의 흔적을, 나는 떠나지 않고 조금 더 걷고 싶었다."


  점심을 든든하게 먹었으므로 저녁은 건너뛰기로 했다. 나는 다시 유르스나르와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로 돌아간다. 내일은 맑은 날이기를!



*<다운튼 애비>의 노 백작부인의 대사(아들이 예전에 알던 사람의 안부를 묻자 대답 대신 한 말)

** 스가 아쓰코 [유르스나르의 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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