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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an 28. 2021

회피의 달인

2021. 1. 28

  눈이 내렸다. 봄이 온 것처럼 온화한 날씨는 믿을 게 못되었다. 주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주목이 순식간에 눈으로 뒤덮였다.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마당에 눈이 베일처럼 휘날렸다. 오후 들어 개인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해서 한바탕 꿈을 꾼 것 같기도 했다. 산의 나무들에 아직 눈이 남아있었다. 옹이가 진 곳 혹은 휘어진 나뭇가지에 내려 쌓인 눈을 바라보다가 중학교 때 미술시간에 그렸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떠올렸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산 카드는 반제품이었다. 반으로 접힌 카드에 나무나 교회 같은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카드였다. 밑그림에 색을 입히거나 다른 그림을 더하는 등의 방법으로 카드를 완성하면 되는 거였는데 나는 그림의 가장자리를 초록색 물감으로 한 벗 덧칠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이 색색의 물감으로 교회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하는 동안 나는 반으로 접힌 카드 안쪽 면에 편지를 썼다. 그때 내가 만들었던, 아마도 우리 반에서 제일 단순했을 카드 속의 나무가 몇십 년이 지나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난 느낌이었다. 흰 눈이 얹혀 거의 검게 보이는 잎 떨어진 커다란 나무가 아침에 본 광고에 겹쳐졌다.


'좋은 책에 투자하는 당신의 안목'이란 문구로 시작하는 북펀딩 안내 메일이었다. 분석 심리학자인 칼 융이 치료했던 환자들이 그린 그림과 그 분석을 담은 책들이라고 했다. 환자들이 그린 그림은 '구체적 상실의 반영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자기 탐구의 표현'이라는 어구가 세탁실 맞은편 비스듬히 가지를 뻗은 나무와 오래전 미술시간에 그렸던 크리스마스 카드를 연결시킨 고리였다. 만약 융이 내가 만든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펀딩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내면을 들여다본다거나 누가 내 내면을 들여다볼 수도 있다는 사고에 익숙하지 않다. 내면을 드러낸다는 것 혹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에는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할까? 내게 묻지 않는 이들이 고마울 때가 있다. 그들의 침묵이 무관심이나 외면이 아니라 일종의 배려라고 여긴다. 아직 나도 나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한 마당에 '내면의 마음'이라니! 나 역시 남의 마음을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한다. 역시 무책임이나 방관이 아니라 존중이다. 가끔 궁금하기는 하지만 역시 '아직은!'이라고 말하는 나는 회피의 달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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