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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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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Feb 27. 2021

오랫만입니다. 하루키 씨!


   간혹 매듭처럼 다가오는 책이 있다. 실을 잇기 위해 스스로 지은 것이든, 어쩌다 보니 엉켜버려 다시 풀기 어려워진 것이든. 손가락 사이로 술술 흘러나가던 물이나 모래 등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이질감, 불쾌하거나 방해받은 기분에 피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이쯤에서 멈춰 달라고 해서 반가운, 적당한 때 딱 맞춰 등장해서 고맙기까지 한, 막간 혹은 완충제라고 할까.


   가만 생각해 보니 구비마다 그런 게 필요한 삶이었다. 직선으로 뻗은 길에서 슬쩍 비켜나는 것, 그늘에 숨어버리는 것, 열중하던 것에서 한눈을 파는 것, 이유 없이 멈추고 모르는 척 어슬렁거리는 것, 그럴 때 하루키만한 친구 이상은 찾기 어렵다는 걸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편집 [일인칭 단수]의 이야기들은 하루키 본인이 말하듯 사사로운 인생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들일 뿐이고 그 정도의 에피소드라면 누구나 한두 개쯤은 꿈속 혹은 현실에서도 가지고 있지 않나 싶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에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 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230페이지의 단편소설집 한 권으로 오랜만에 만난 하루키에서 뒤돌아서는 건 아무래도 아쉬워서 같은 번역자의 작업을 찾아보았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구입해 놓고 읽지 않았던 책이다! 이런 횡재가 있나! 어제저녁부터 방에 홀로 박혀 킥킥거리고 깔깔거리며 다 읽었다. 그리고 역시 부러워서 의기소침해지고 말았지만 밀어두었던 공책을 다시 펼치고 연필을 깎았으니 역시 고맙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일단 씁니다. 만약 친구가 와주지 않더라도 와줄 법한 환경을 만들어 둬야죠. 저쪽에 방석도 좀 깔아놓고, 청소도 하고, 책상도 닦고, 차도 내려 두고. 아무도 오지 않을 때는 그런 '밑 준비'라도 해두는 겁니다. 아무도 안 오니까 오늘은 실컷 낮잠이나 자볼까, 이러지는 않아요. 전 소설에 대해서는 근면한 편이라서요. 82


스스로를 알기 위해 글을 쓴다고 하면 아무래도 자아 찾기 같은 진부한 표현으로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아니다. 소설가에게는 문장을 갈고닦는 행위 속의 한순간, 그 체험이 곧 자기 자신이다. 소설가가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자신에 대해 글을 쓴다거나 하는 행위가 아니라, 문장을 갈고 다듬는 행위 자체다. 226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충고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 쓰는 법을 가르치기도 어려워요. 236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지만 남자는 기본적으로 바보거든요. 거의 아무 생각이 없어요. 저도 한때 남자아이였으니 잘 압니다. 머릿속에 어리석은 생각만 가득하죠. 지금도 대체로 비슷하지만요.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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