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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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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Apr 29. 2021

마당 사월

마당 정리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지인과 안부를 나누다가 마당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내가 한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마당 있는 집에 산 지 십 년이 넘어가니 이제 마당과 나 사이에도 암묵적 합의가 절로 생긴 듯하다는, 그래서 봄기운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걸 내가 알아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둘러 크로커스들이 올라왔고 히아신스와 수선화 튤립들이 앞 다퉈 피기 시작했으며 잡초들은 알아서 마당 구석이나 화단 끄트머리 잘 안 보이는 곳에 모여 자기들끼리 속닥이며 조금씩 자라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정말 그런걸까? 내 입으로 말해 놓고도 우스웠다. 꽃은 재촉하지 않아도 알아서 피고 잡초는 거슬리지 않을 만큼만 자신을 드러내는 봄이라니 그게 가능할까? 싶었다. 그리하여 아침을 먹자마자 모자를 쓰고 나간 게 바로 오늘이었다.     


한창인 물망초
물망초와 앵초, 작약과 카네이션, 튤립이 모두 모였다.
매발톱
공기가 맑고 해가 뜨거운 날에는 꽃잎들이 점점 투명해진다.


 그동안 마당에 나가지 않았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마당에 나가서 물망초가 얼마나 퍼졌는지 스노드롭은 올해도 나오지 않을 건지 크리스마스로즈 봉오리가 몇 개나 되는지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잎을 들추고 봉오리를 헤아렸다. 매화 향기가 진하지 않아서 혹은 꽃사과와 앵두나무에 꽃이 적어서 서운해하다가 목련 꽃잎이 툭툭 떨어져 내리면 고개를 돌렸고, 레이스처럼 펼쳐진 남천의 노란 새순을 보면 봄이 머문 강가의 물안개를 떠올리기도 했다. 작약이 나올 곳에서 무스카리와 튤립 새순이 뾰족하게 보이면 죄책감에 못 본 척 시치미를 뗀 것도 여러 번이었건만 그동안 꽃잎 떨어진 꽃대나, 겨울을 이겨내지 못하고 삭정이가 된 나뭇가지들, 벌써 떼어냈어야 할 시든 잎들은 왜 눈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 게을렀다는 것 외에는 어떤 말도 변명일 뿐이란 걸 부인할 수 없겠다. 마당 정리할 때마다 옆에 끼고 다니는 바구니를 찾으니 그건 또 어느새 고양이 집이 되어버렸구나.


히아신스
크로커스
상사화
앵초와 작약 사이에 크로커스


3월 초입에 겨울 흔적을 걷어냈다. 마른 잎 아래 숨어있던 싹들이 더 이상 기다리고 있지는 못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말랐지만 여전히 빳빳한 잎을 뚫고 새순들이 솟아올랐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말랑하고 여린 연두색 작은 잎들이 어떻게 두툼한 목련 잎이나 참나무 잎을 뚫고 나올 수 있었는지 바라볼수록 신기했다. 하긴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기 마련이니까. 봄이라면 더더욱. 오후만 되면 심술궂은 바람이 불어 올라오는 것도 그렇고 난방을 안 해도 될 것 같은 밤의 끝에 서리가 내리는 새벽도, 도무지 심은 기억이 없는 낯선 식물의 출현도 다 봄이 하는 일이다. 봄이니까 이해는 건너뛰고 그냥 받아들이기. 신기하게도 올해는 그게 된다.     


살찐 고양이
말 안듣는 고양이


 모두 같지 않아서 좋다. 한 날 뿌린 씨앗들이 제각각 눈을 뜨고 고유함을 지키며 자라는 게 좋다. 한 몸에서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변주가 좋다. 들여다보면 제각각인데 한데 모인 모습이 하나 같아서, 그 섞임과 받아들임을 닮고 싶다. 새싹들이 나오자 신난 건 나보다 고양이들이다. 앵초와 무스카리가 소복하게 모여 자라는 곳을 쿠션으로 알고는 그림같이 앉아있다가 내가 다가가면 누워서 뒹군다. 나오라고 혼을 내도 소용없다. 빤히 바라보다가 다가와서 꼬리로 내 다리를 감는다. 꽃보다 고양이가 많은 봄이다.      


명이 장아찌 담기
봄나물 무치기(사온 것들)


 풀을 뽑으면서 이미 꽃이 다 떨어지고 넓죽한 이파리만 추레하게 남은 튤립들도 정리했다. 덩달아 곳곳에 자라고 있는 부추도 잘랐다. 가을이면 별처럼 반짝이는 부추꽃이 얼마나 고운지 차마 잘라내지 못하고 몇 해를 지났더니 처음 심은 곳이 어디인지 모를 만큼 사방이 부추 천지다. 부지런해져야 할 계절이 왔음을 부추의 그 농밀한 향을 맡으면서 실감한다. 명이는 수확해서 장아찌를 담근 지 벌써 오래다. 남은 이파리 사이사이에 꽃봉오리가 올라와있다. 명이 옆에 곰취는 바로 엊그제 잘려 봄나물이 되었다. 꽃이야 바라보고만 있어도 되지만 먹거리가 되려면 손이, 그것도 때를 놓치지 않는 바지런한 손이 필요하다. 자른 부추로 전을 부쳤다. 봄은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 아이들처럼 빠르다. 마당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꽃봉오리 생겼나 궁금해서 찾아보면 꽃은 이미 한창이고, 싹이 텄나 싶은데 벌써 무릎만큼 자라 있다. 식물들은 하루도 멈추지 않는다. 물망초에 취해 있는 동안 블루베리는 꽃을 가득 피웠고 꽃 진다 서러워 고개 숙인 날에 목련은 새 잎으로 뒤덮였다. 바람 불면 꽃잎 날리고 돌아서면 어느새 그림자가 긴 봄날.     


꽃이 피기 전의 물망초
꽃이 피기 시작한 물망초
꽃이 한창인 물망초
여름 같은 봄


사월이 간다. 작약과 모란 봉오리가 부풀었다. 오월이면 장미도 수국도 한창일 테다. 손등이 벌써 그을렸다. 이런저런 열매들로 잼을 만들고 부추전을 부치고 돌미나리를 무칠 것이다. 토마토 곁순을 딸 때마다 숨을 모으고 로즈메리와 월계수 잎을 잘라내면서 황홀하겠지. 소쩍새가 울기 시작했으니 곧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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