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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y 28. 2021

여전히 읽고 먹고

등대로, 나방의 죽음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같은 책을 읽는다고 하면 대체로 더 빨리 읽기 마련이지만 소수의 책들은 거듭 읽을수록 그 속도가 느려진다.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읽고 싶은 책들은 대개가 후자에 속하기 마련이다. [등대로]를 처음 읽었을 때는 램지 부인만 보였다. 다음 읽기에서는 각각의 인물들이 새롭게 보였고, 그다음에는 그들 모두가 너무 가여웠고, 그리고는 구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의 읽기에서는 축제날 장터의 천막 안에서 수정구슬을 들여다보며 건너편에 앉아있는 이가 구슬 속의 누구와 닮았는지 살피는 기분이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누구'가 아니라 그가 누구든지 상관없이 느닷없이 맞닥뜨리곤 하는 '순간'을 골라내는 것 같았다. 등장인물은 각각의 개인이기도 하지만 그들 모두가 한 사람의 여러 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 그러니까 삶은 아주 단순한 기본 요소 몇 개만으로도 충분하고 또 그 뒤편에는 언제나 슬픔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며, 진짜 천재들은 어쩌면 애쓰지 않고 만족하는 이들이 아닐까 라는.

울프는 읽기의 기쁨을 안다. 특히 에세이가 독자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은 '읽는 동안의 즐거움'이 전부라고 말할 때의 그는 최고다. 읽을 때는 글이 주는 감흥에 흠뻑 빠져있다가 책장을 덮으면 단잠에서 깨어나듯이 활력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울프의 기준을 [나방의 죽음]은 너끈히 뛰어넘는다. 그리스어를 몰라도, 콩그리브나 록하트의 이름을 처음 들어도, 제인 오스틴이나 톨스토이에 관한 울프의 언급을 얼마나 접했는지에 상관없이 유장하고 거침이 없다. 구름 사이로 나온 긴 햇살이 흐르는 강물을 뚫고 들어가 강바닥의 조약돌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유려하고 반짝인다.


 표제작인 '나방의 죽음'을 남겨 두고 비 그친 마당에 나갔다. 토마토 꽃을 바라보며 어깨와 등을 데운 후 수제비 반죽을 했다. 멸치 육수 내고 감자와 호박을 썰어 넣고 반죽을 얇게 잡아당겨 수제비를 뜬다. 멀리서 우렁우렁 하늘이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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